라이프 스타일로서 청년과 청년 하우징
조은
분량5,565자 / 10분
발행일2014년 3월 31일
유형칼럼
우리의 주거 공간은 4인 가족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바깥으로는 철저하게 닫힌 내부 지향적 구조다. 1인 가구의 주거는 이것보다 심한 단절을 겪고 있다. 사회적 분리는 물론, 공간도 허술하다 보니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을 넘나드는 경험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1인 가구가 급속하게 늘고 있지만, 이미 심화된 공간의 자본화로 마땅히 살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대안으로 공유지를 갖는 ‘혼자 사는 우리 집’이 등장하고 있다. ‘통의동집’ 거주자인 건축가 조재원이 사회학자 노명우를 인터뷰하고, 사회학자 조은이 청년이 가져야만 하는 공유지에 대한 칼럼을 썼다.
‘하숙집’ 다시 읽기
‘청년 하우징’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 머뭇거리다가 하숙집과 지방 사투리의 주가까지 올려놓은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에 편승해 ‘하숙집’ 읽기로 시작하기로 했다. 하숙집은 한때 가족을 떠나온 대학생들의 ‘일시적 집’의 대명사였다. 계층적 한계와 시대적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청년 하우징 이슈의 원형일 수도 있는 듯해 드라마 ‘응사’의 하숙과 그것이 촉발한 실제의 ‘하숙집 체험기’ 논란을 통해 청년 하우징의 현실과 로망의 간극을 투사해 보고자 한다. ‘응사’에는 방값 걱정 없는 버스회사 사장, 대형 선박의 선주, 양계장 사장의 아이들, 창창한 앞날에 대한 보증서를 확보한 대학생, 생계 걱정 없이 운동장을 누비거나 스타들의 ‘빠순이’가 된 젊음, 엄마 아빠처럼 챙기고 밥 먹여주는 하숙집 주인, 한솥밥으로 자매애까지 만들어내는 의사擬似 가족 공동체에, 연애 상대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등 젊은 날 하숙의 로망이 다 들어있다. 반면, 현실의 하숙은 늘 허기지게 하는 밥, ‘남친’의 하숙방에 갇혀 주인 아줌마 눈치 보고, 부모 지갑 생각해서 싼 집 찾아 이삿짐을 싸거나, 하숙에서 자취로 바꾸고,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과 싸우면서 하숙이라는 영세 자영업 억척 아줌마들의 생활 전선을 추억하는 공간이다.
이 간극이 바로 현재의 청년 하우징이 직면한 이율배반적 공간이다. 방값 걱정 없이 혼자 살게 해줄 부모는 모든 젊은이들의 로망이지만, 그런 능력 있는 부모는 별로 없고 공간은 자본에 포섭되었고 외로움조차 상품화되었다. 공간의 자본화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는데 무자본일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의 욕망은 이율배반적으로 발현된다. 가족이라는 실체는 점점 오리무중인데 ‘따뜻한 가족’ 만들기에 대한 꿈은 접지 못하고 있다. 그 근저에 젊음을 담보로 하는 설렘과 뜨거움과 겁 없음이 있지만 그 열기는 늘 불온하다. 그동안 집 없는 젊음의 문제는 오랫동안 사회문제로 대두하지 않았다. 그 은폐의 기제는 청년의 ‘젊음’이었다. 하숙의 현실은 곧 이 나이 또래의 낭만으로 은폐되었고 구차한 하우징이 구차하지 않은 또는 구차할 수 없는 하우징으로 채색되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청년 하우징은 ‘집 없음’ 또는 ‘거주의 빈곤’ 같은 사회문제의 영역으로 부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때로 젊음은 계급을 은폐시킨다.
‘유동적’ 청년: 청춘의 유예
하숙과 자취 등 젊은이들 주거의 사회사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사회학적 분석 거리다. 가족을 떠난 ‘젊은이들의 방’ 문제는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슈와 내용을 달리하면서 시대마다 있었고 다르게 문제시되었다. 청년 하우징의 문제는 우선 청년이 얼마나 유동적인 개념인가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국제기구 유엔UN은 청년youth을 “의존적인 유년기에서 독립적인 성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이해해야 한다”고 정의한다. 고정된 연령층이기보다는 훨씬 “유동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개념이라고 밝히고 있다. 생물학적 연령보다는 “독립적인 성인기”라는 사회적 정의에 주목하라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사회마다 시대마다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근래에 들어서 우리도 20~29세로 규정되어 있는 청년의 정의를 30대 초반까지 개정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
여기서 “독립적 성인기”를 가장 간단하게 측정 가능한 조작적 정의를 해보면 ‘혼인 여부’가 될 것이다.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1960년 초혼연령은 남자 25.4세, 여자 21.6세였다. 2012년 현재 초혼연령은 남자 32.1세, 여자 29.4세이다. ‘독립적 성인기’는 반세기 동안에 최소한 7~8년씩 유예되고 있다. 인구센서스에서 ‘가임 여성’ 미혼율을 보면 1970년 20~24세 여성의 미혼율은 57.2%, 25~29세에 9.7%였는데 비해 2010년에는 같은 연령대에서 각각 89.1%와 40.1%가 미혼이다. 그리고 30~34세 연령층에서 미혼율은 1970년에는 1.4%, 2010년에는 20.1%로 나타난다. 즉 여성들 중 미혼으로 남겨진 이른바 ‘청년’ 여성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 그만큼 상대 남성들의 숫자도 늘었다고 할 수 있다. 저출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만혼 문제로 자주 인용되는 통계자료를 뒤집어 읽는다면 바로 우리의 청춘이 끝없이 유예되는 현장이 드러나고 청년은 유동적 개념이 된다. 지난 반세기는 엄청난 숫자로 증가한 ‘청년의 탄생’을 가져온 셈이다. 그러나 숫자로서가 아닌 사회적 청년의 탄생은 보이지 않았다. ‘독립적 성인기’의 선결 조건인 경제적 독립 또한 유예되었고 물적 지반은 더욱 약화되었다. 청춘이 유예된 이들은 그전 세대보다 오히려 성적 표현은 훨씬 개방적인 세대다. 성적으로 활발한 연령대의 미(비)혼 증가와 이들의 사생활의 공간은 새로운 이슈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 러브텔은 왜 이리 많은지, 인공유산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음에도 한때 유산율이 왜 세계 2위를 기록했었는지, 그리고 청년들이 몰린 대학가와 공단 지역에 방값을 아끼려는 동거족의 등장 등 새로운 풍속도는 어떻게 읽어야 할지 ‘왜’와 ‘어떻게’ 로 이어지는 수없는 질문은 청년 하우징의 숙제거리에서 비켜 있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압축 발전과 토건 국가, 아파트공화국의 출현, 치솟은 부동산과 ‘88만 원 세대’의 등장은 서로 무관한 사회적 이슈인양 미심쩍게 넘어갔다.
맥락을 좀 벗어난 듯하지만 통계와 숫자들 대신 청년 하우징의 일단에 대한 개인적 기록을 가져와 보기로 한다. 얼마 전 아주 우연하게 <내 친구의 방>이라는 쪽지 같은 짧은 에세이를 대학 시절 편지를 주고받은 친구가 돌려준 편지 꾸러미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친구의 방은 변두리의 녹색 아파트 3층에 있다. 따로 돌아갈 곳이 있을 듯 하면서도 그냥 머물러 살며 서울에 흡수 되어가는 사람들 속에 나도 끼어버린 것을 알 때쯤 내 친구의 방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중략) 그 아파트의 방에 앉아서 “방이 없는 연인”의 이야기를 수월한 화제로 여길 만큼 어느새 우린 그렇게 되어 있었다. 『제8요일』이란 소설의 ‘아그네시카’와 ‘피에트레크’이란 이름에서 이국을 느끼지 않을 만큼.……“ 1
나는 1965년 서울에 유학 온 지방 학생이었다. 대학 1학년 때는 기숙사, 2학년 때는 입주 아르바이트와 친척 집, 3~4학년 때는 하숙과 자취 등 다양한 ‘하우징’을 경험했다. 1968년이거나 1969년쯤이다. 서울에 대단지 아파트가 생기기 전 신촌에 막 생긴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 남동생과 살게 된 ‘내 친구의 방’은 부러움과 사유의 공간이었던 모양이다. 난 그때 『제8요일』을 줄 쳐가며 읽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보다도 벽으로 둘러싸인 방 한 칸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문제의 원인은 있는 거야. 만약 로미오와 줄리엣이 1956년에 이 바르샤바에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우리처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갖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제일 안타까운 건 이런 상황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이야.” 2
이런 구절에 꽂혀 1960년대 후반 서울과 1950년대 후반 폴란드의 젊음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는데 50년이 지난 서울의 젊은이들 또한 “아 지금 우리랑 비슷하네”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물다섯이 아니라 서른다섯의 젊음들이.
청년 공유지를 향해
현시점에서 청년 하우징에 대한 관심은 하숙촌이 고시촌이 되거나 하숙방이 원룸텔이 되는 외양의 변화보다는 라이프스타일로서 청년 또는 청년 하우징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젊은이들은 가족제 생산 양식domestic mode of production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데도 여전히 가족제적 사회관계를 원하는 사회에 놓여있고 전근대적 가족 제도를 가슴에 품고 머리는 근대를 넘어서 탈근대(포스트모던)를 넘나들면서 현실과 로망 사이를 배회한다. 젊은이들이 꿈꾸는 이율배반적 청년 하우징의 복잡성은 여기에 있다. 청년 하우징은 이런 본질적 이중성의 내파를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지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공동체, 함께 살기 등의 단체생활은 ‘혼자 살기’ 만큼이나 배척한다.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우리에게 꽤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공동체 대신 들어온 단체생활과 단체시설이라는 이름의 정글에 시달려 왔으므로. 미국 유학 시절을 돌이켜 봐도 우리 유학생들은 기숙사 안의 식사공동체 같은 코업co-op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끼리도 코업을 잘 안 했다. 한 사람의 개인이고 싶지만 ‘개인’이도록 그것마저 내버려두지 않은 사회에서 자라서 더욱 개인적 삶의 공간과 삶의 방식에 집착했던 것 같다.
지난 50년 동안 ‘청년’이라고 이름 할 인구 층은 엄청난 증가를 했고 이들이 몸을 누일 공간은 더욱 사유화되었다. 무엇보다도 삶의 공간은 엄청난 자본의 증식처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 하우징을 어떤 구조로 배치하고 그 하우징에 어떤 기능을 부여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이율배반적 욕망의 공간을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선택의 문제로 만드는 일 또한 그만큼 중요하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서 청년 그리고 청년 하우징을 창안하는 일은 새로운 숙제 거리다. ①‘혼자 또 같이’ 또는 ‘혼자 사는 우리 집’은 어떻게 가능하며 ②청년이 한 가족에서 다른 가족으로 이행하는 징검다리 시기라면 이를 어떻게 공간적으로 소화하고 어떤 라이프스타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③짝짓기에 몰두하는 사회에 대한 해법을 어떻게 해야 할까도 숙제다. 노인 자살을 줄이기 위해 짝짓기를 권장하고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에 국가가 나서는 사회에서 혼자 살기에 나선 방 없는 젊은이들의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지, 또는 ④“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는 유목민 시대에 젊은이들이 모인 곳은 지방 사투리만큼 또는 그보다 더 많은 다국어의 공간이 될 것이고 글로벌 청년유목민 또한 거슬릴 수 없을 것이다.
여러 의미에서 청년 하우징은 우리 사회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실험의 장이고 앞으로 공유지commons의 영역을 어떻게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지의 실험의 장일 수밖에 없다. 코업, 룸 셰어링, 하우스 셰어링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과 ‘따로 또 같이’나 세대 간 섞여 살기에 대한 실험의 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고 사유화로 질주하는 사회에서 청년 주거권은 어떻게 확보할 것이며 청년들은 어떻게 주체로 보일 것인지 등 청년 하우징은 이 모든 실험이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새롭게 시도해야 하는 실험의 장이다. 곳곳에 여러 방식의 게릴라처럼이라도 청년 공유지를 확보하는 일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할 때다.
조은
사회학자. 동국대 명예교수. 다큐멘터리 영화 <사당동 더하기 22>를 제작 감독하고 소설 『침묵으로 지은 집』과 문화기술지 『사당동 더하기 25』를 썼다. 정년퇴임 뒤 학술 양식 글쓰기에 거리를 두면서 어떤 글쓰기, 어떤 작업이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라이프 스타일로서 청년과 청년 하우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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