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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것, 함께 사는 것

노명우 × 조재원

우리의 주거 공간은 4인 가족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바깥으로는 철저하게 닫힌 내부 지향적 구조다. 1인 가구의 주거는 이것보다 심한 단절을 겪고 있다. 사회적 분리는 물론, 공간도 허술하다 보니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을 넘나드는 경험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1인 가구가 급속하게 늘고 있지만, 이미 심화된 공간의 자본화로 마땅히 살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대안으로 공유지를 갖는 ‘혼자 사는 우리 집’이 등장하고 있다. ‘통의동집’ 거주자인 건축가 조재원이 사회학자 노명우를 인터뷰하고, 사회학자 조은이 청년이 가져야만 하는 공유지에 대한 칼럼을 썼다. 


노명우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아도르노의 쇤베르크 해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요 연구 분야는 사회학이론 및 문화예술사회학이며, 한 때의 꿈이 건축가였기에 도시와 공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세상물정의 사회학』 등이 있다. 

인터뷰 조재원 건축가. 공일 (01)스튜디오 대표, 서울시 공공건축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혼자 산다는 것, 개인

조재원 선생님이 쓰신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사월의책, 2013)도 읽고, 『세상물정의 사회학』(사계절, 2013)도 보았는데, 모두 작년에 쓰셨으니 연구년을 매우 굉장히 알차게 보내셨어요.

노명우 셰어하우스에 대한 책이 아직 거의 없죠. 일본 책이 번역된 게 있긴 한데, 너무 매뉴얼 같죠. 그래서 섭외 연락 받은 후에 이곳에서 운영하는 ‘통의동집’을 보고, 직접 셰어하우스의 의미에 대해서 쓰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 쉐어하우스라는 것이 겉에서 보기와 달리 직접 부딪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외부적 시선에서 그것을 이론적, 철학적으로 푸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을 것 같거든요.

조재원 어떤 이상적 목적보다는 실제로 이 정도 질의 주거환경을 대체할 다른 것이 없다는 게 중요하죠. 사실 혼자 산다는 것, 혼자로서 인정받는다는 것과 같은 일련의 문화들이 따라오지 않으면 고립되기 쉬운 것 같아요. 그런 문화가 있으면 혼자가 돼도 여전히 섞일 수 있고, 개인이 존중되는 사회라는 게 그런 문화를 전제로 개인을 존중하는 거잖아요.

노명우 그래서 굉장히 용기가 필요해요. 혼자임을 고집하지 않았을 때, 집단의 무리가 되었을 때 우리가 얻는 이점도 많거든요. ‘선배님’이라는 말은 안 될 것도 되게 하는 힘이 있는데, 평칭의 세계, 개인과 개인 간의 자유로운 연합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누구를 ‘선배’라고 불렀을 때 얻는 이익을 포기하겠다는 용기인 거죠. 그런 용기가 생기려면 그만큼 개개인이 독립성에 대한 강한 갈망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저도 한국인이다 보니 집단으로 묶였을 때 어떤 경우 좋은 문제 해결의 방법일 수 있는지를 아니까 가끔 그런 것을 동원하곤 합니다. 상당히 비겁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조재원 그게 비겁한 걸까요? 상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보다 오히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열어주는 것일 수 있잖아요.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앞부분에 혼자라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적 통념은 아주 흥미로웠어요. 어떤 문화가 개인을 이렇게 묶어 놓는 것이 굉장히 억압당한다고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사회적으로는 개인의 독립성을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도 결혼, 가족 같은 영역에서는 프로그램된 것을 따라가기도 하거든요. 일할 때는 굉장히 독립성을 강조하면서도 결혼이나 가족 안에서의 역할로 가면 다른 태도를 가져요. 대치하는 모델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노명우 저는 그것이 외부적으로 공공 공간이 발달하지 못한 한국사회의 공간배치와도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대부분의 공공 공간은 상업화된 영역으로 어떤 형태로든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가는 공간이죠. 그래서 사적 영역과 공공 영역을 넘나드는 경험을 도시에서 할 수가 없어요. 주거 형태도 극단적으로 아파트 중심인데 핵가족을 전제로 설계되니 경험할 수 있는 공간 형태가 한정되어 있어요. 아파트를 제외하면 고시원 같은 극단적 형태로 골방화된 공간 형태라고 할 수 있죠. 중간에 점이지대도 없고 다양한 패턴도 없고, 그렇다고 1인 가구로 단독주택을 관리하면서 사는 것도 무리한 일이고. 그래서 불가피한 타협지점이 오피스텔인데, 여기는 철저한 상호무관심이라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요. 어느 곳이든 최소한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필요한데 오피스텔 공간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구조인 거죠. 여러 가지 구조적 조건들을 유지하면서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의 배치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면 좀 답답해요.

그런데 이것을 충족시켜주는 공급은 현재로서는 없는 것 같습니다.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를 쓰면서 사회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도 있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주거공간 혹은 공간배치에 대한 다양한 실험들이 전제되거나 수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책에서 아무리 ‘독립적인 개인들이 고립되지 않으면서도 서로 연결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는 이야기를 해도 공염불이 되는 거죠.

조재원 물론 사대부 집이긴 하지만, 옛날에는 사랑채, 안채 이렇게 남녀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의 아파트 평면은 부부가 꼭 한 단위로 침실에 갇히고, 아이들은 쉽게 감시될 수 있는 문간에 놓이는 식으로 규정되어 있잖아요. 또 가족은 화목해야 해서, 주방과 거실은 다 트여있고요.

노명우 또 모든 것을 감시하는 위치에 있는 전업주부가 주로 생활하는 주방이 있어요.

조재원 알랭 드 보통이 “결혼은 사랑, 에로틱한 섹스, 가족에 대한 욕구, 이 모든 것을 결혼이라는 제도에 다 부담시켜 한 번에 모든 것을 경제적으로 해결하려는 부르주아 문화의 소산”이라고 했거든요. 어찌 보면 아파트도 사회안정에 필요한 기본적인 가족 단위가 화목하고 단란하도록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인 것 같아요.

개인으로서의 삶을 보장해주는 공간에 대한 고민

조재원 보통 혼자 산다고 하면 기혼, 미혼의 관점에서 통념적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책을 읽어가면서 ‘혼자’라는 것이 결혼의 여부와는 관계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했어요. 책에서 언급하신 ‘자기밀도’, ‘역할밀도’에 대해 제 주변의 결혼한 친구들도 모두 공감했어요. 스스로가 자기 역할에 치여서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처지라고 하면서요. 하지만 (식구가 셋일 때) ‘3분의 1의 시간은 나를 위해 쓰겠어’라고 하면 이기적으로 비치지 않을까 걱정하더라고요. 공감은 하지만 행동으로는 연결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노명우 실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죠. 사실 아파트라는 구조에서 남편과 아내가 그런 공간을 가질 수가 없잖아요. 이 책이 나오고 나서 결혼 안 한 사람들은 자기 위안, 혹은 자기가 선택한 삶에 대해 어떤 정당성을 부여해 줘서 반가워하기도 했고, 결혼하신 분들도 굉장히 공감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그런 것을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족구성원의 역할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이 매우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이 그런 거지’ 하고 받아들이면서 스스로의 욕구를 묻어버립니다. 원하는 것을 실현해야만 행복해지는데, 그 조건의 실현을 개인에게만 남겨두지 않고 공공의 방식이나 협업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게 저의 궁극적인 고민이에요.

사회가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을 코-워크 co-work 공간을 사용하는 것처럼, 제 경우에는 서재를 공유하는 커먼 라이브러리common library가 하나의 제안일 수도 있겠습니다. 좀 더 너른 공간에서 공부하고, 책 보관도 해결하고,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쓰면 서로 도움을 받을 수 있겠죠.

조재원 공간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니 굉장히 재미있네요. 저는 소셜키친에 관심이 많은데, ‘통의동집’ 지하 1층 주방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한번은 입주자들이 이웃을 초대하는 오픈 키친을 했는데, 말씀하신 커먼 라이브러리와 비슷한 역할을 했어요. 음식을 매개로 주방 기구나 식자재를 공유했으니까요.

노명우 그렇죠. 밥도 1인분만 하면 맛이 없잖아요.

조재원 요즘 대학가에서는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치킨 하나를 혼자 먹기에는 많으니 같이 시켜서 SNS로 장소를 정하고 만나 각자 가져가는 게 유행이라고 해요. 흥미로운 것은 개인이 연결되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가능해지는 기반이 SNS와 같은 IT 플랫폼이라는 거예요.

노명우 앞으로도 계속될 큰 흐름이라고 봅니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이 도시생활자이고, 농촌에 대한 경험, 기억, 향수조차 이제 없습니다. 이런 도시적 감수성을 사회제도가 흡수하지 못하고, 공간배치도 그것을 반영하지 못하기에 많은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심해지는 거죠.

조재원 사실 물리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온라인 환경과 SNS는 이웃이나 동네를 형성하는 데 좀 더 쉽게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물리적 공간에 비해 SNS상에서는 상대적으로 조직이 쉽고, 또 그 쉬운 이유가 약간의 익명성과 거리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죠. 선생님께선 개인적으로 SNS를 어떻게 활용하세요?

노명우 카톡은 매우 사적이며 실제로 인간적 유대가 있는 커뮤니티적인 성격으로 사용한다면 트위터는 익명의 누군가와 하는 의사소통이죠. 페이스북은 그 중간이에요.

조재원 트위터는 도시공간에 비유하면 길 혹은 광장 같은 느낌이에요. 옆 사람이 뭐라고 얘기하면, 무시할 수도 있고, 관심이 가면 참여할 수도 있는 담 없는 공간인 셈이죠. 페이스북은 문을 두드리거나 열어야 하는 장치가 있는 공간이고요. SNS가 장소적 특징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이 실제 공간에서 못하는 것을 SNS에서 구축하려는 노력이 보여 흥미로워요.

노명우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원하는 사회적 관계의 층위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죠. 오프라인에서 경험하는 사회적 관계의 층위는 너무 납작한데, SNS에서는 그것이 조절 가능해요. 광장에서 익명성을 유지하며 누군가와 상호작용을 하고 싶은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고 싶은지, 혹은 정말 나만의 공간에서 이야기하고 싶으냐에 따라 관계의 수준을 직접 조절할 수 있어요.

개인으로서의 성숙이란

조재원 가족 단위 안에서는 나이가 들면서 가족관계 안에서 성숙해지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개인으로서 자신의 성숙도를 늘려가는 것은 무엇을 통해 가능할까요?

노명우 성숙은 ‘시간’과 ‘풍부한 사회 경험’이라는 두 가지 변수가 충족되어야 해요. ‘꼰대질’은 시간이라는 변수는 채워졌지만, 사회적 관계의 풍성함을 경험하지 못한 경우죠. 풍부한 사회적 경험은 특정 형태의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레벨의 관계가 양적으로 축적되는 것을 의미하고요. 모든 것을 뭉개서 친인척관계로 환원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공적 관계로 환원시키는 사람도 있어요.

조재원 그럼, 이런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쌓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이와는 관계없이 사람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맺으며 사회적으로 성숙해지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가능할까요? 나이 어린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를 잃지 않기 위해 수평적 관계의 허용과 수용보다는 자기만의 채널을 만들지 않는 성숙함이 필요할 텐데요.

노명우 우리는 관계의 수직성에만 익숙할 뿐 수평성에는 약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도 나이가 들면서 잘 제어해야 하는 부분이 관계의 수직성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다 들여다봐야 할 문제는, 수직성 자체보다도 모든 관계를 수직적으로 환원시키는 데 있어요. 나이 드는 것은 관계의 수직성만 강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불행하게도 나이 든 사람들이 추하게 보이는 거죠. 관계의 수평성은 개인에 대한 감각에 의해서 키워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조재원 혼자인 젊음은 자유와 흥미로운 것을 연상시키지만, 혼자와 노년이 결합한 상은 어떤 것을 연상하게 할까요?

노명우 그게 숙제예요. 모델이 없는 것 같거든요. 왜 우리에겐 귀여운 할아버지, 내지는 깜찍한 할머니, 소년 같은 할아버지, 여자의 흔적이 있는 할머니는 없을까요. 현재는 어떻게 하면 다른 형태의 아저씨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저의 고민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20대는 자기가 싫어하는 모습의 아줌마, 아저씨를 걱정하기보다 어떻게 다른 형태의 중년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해요. 그러면 자신이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가 좀 더 선명해질 테니까요. 그다음에는 노년에 행복하게 죽는 방법, 사회에 폐를 끼치지 않고 인생을 마무리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것은 이런 절차는 보여주지 않아요. 절대 나이를 먹을 것 같지 않은 20대뿐이죠. 중년이 가지는 아름다움과 품격이 분명히 있을 텐데 모두 어려지려고만 해요.

혼자 사는 삶의 윤리

조재원 책 중에 개인의 윤리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에 특히 공감했어요. ‘골드미스’가 화려하게 치장해서 ‘나는 비참한 독신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게, 경제적으로 싱글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배타하고 소외시키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요. 그런 프레임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내적으로는 그런 지향성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었거든요. 사회에서 일반적인 가족구성원으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초라하게 비치고 싶지 않은 심리가 다른 것으로 바꿔보려는 욕구로 나올 수 있다고 봐요.

노명우 자신이 화려해 보이고 싶은 욕구는 포기하지 않아야 해요. 다만 골드미스의 경우, 그것을 소유 · 소비의 방식으로 풀려는 것이 문제죠. 혼자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품격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고상함은 화려함의 욕구를 소비의 방식으로 풀려고 하는 사람은 도달할 수 없는 품위 · 품격을 지닌 것이거든요.

조재원 전에 마포도시농부학교를 잠시 다니면서 소규모로 농사를 짓는 방법을 배웠는데, 자기 먹을 것만 소량 키우려면 종자 씨를 받아야 다양성이 유지된다고 하더라고요. 이와 비슷하게 개인이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는 자유롭기 어렵겠지만, 개인으로 존재한다면 새로운 삶의 모델들을 도전해보고 실험해 볼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이게 어려운 이유는 지금의 혼자인 상황이 과도기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해요. 셰어하우스에 막상 살아보니, 진작 자유로운 삶의 모델에 도전해 볼 수 있었는데 왜 이제껏 망설였는지, 저 역시 혼자인 상황을 임시적이고 극복해야 할 상황으로 생각했던 거예요.

노명우 실제로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잘 아시다시피 그렇다고 해서 그 순간에 대해 면밀한 고려가 없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죠.

조재원 가족, 결혼에 대한 막연한 계획을 늘 생각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은 현재의 일시적인 상황에서의 지향점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해요. 다른 모델이 없어서 막연한 것도 큰 이유겠고요.

노명우 어떤 공동의 일이 일어날 수 있으려면 머릿속에 있는 것을 미루지 말아야 해요. ‘나중에 돈 벌지도 모르잖아’ 하는 식으로 ‘나중에’가 모이면 욕구가 있어도 계속 미루게 돼요.

개인과 연대, 미래에 대한 고민

조재원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궁극의 지향점에서 사람, 가족, 주거가 궁금해요. 결혼을 대체할 수 있는 더 구체적인 연대가 있을까요?

노명우 우선 가족관계는 매우 단단한 관계에요. 사람들은 단단함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지만, 불편을 느끼기도 하거든요. 저는 현재의 양자택일 상황이 아니라 그 중간에 많은 점이지대가 필요하다고 봐요. 예를 들어, 셰어하우스가 경제적 측면에서도 도움이 되지만 성격 면에서도 대안적 형태의 파트너십을 이룬다면 세제상 혜택과 같은 다양한 장치가 생길 수 있을 거예요.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회적 혜택을 못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면에선 사회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각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의 파트너십 형태에 들어가면 됩니다. 아주 유연한 파트너십부터 시작해서 용기가 생기면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단단한 가족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니면 영영 그 관계로 안 들어가고 가족관계와는 다른 형태의 (유연한) 파트너십 안에 머물면서 고립되지 않고 살 수도 있을 거고요.

조재원 지금의 닫힌 생각들을 환기해주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사회적 제도 등이 너무 가족 단위에만 맞추어 설계 · 실행되고 있는데, 그것이 개인으로까지 확대되어야 더 다양한 삶이 가능해지겠죠.

노명우 어떤 가정은 행복해도 다른 가정은 가족이기 때문에 불행할 수도 있어요. 단단한 관계 때문에 매 맞으면서, 부모에게 성폭행 당하면서 가족 안에 남아있는 분들도 있고요. 그것이 밖으로 알려지지 않고, 이데올로기 상으로 “가정은 행복해야 한다”고 전제해버린 것뿐이지, 가족은 행복할 가능성만큼이나 가족이기 때문에 불행할 수도 있거든요.

조재원 맞아요. 오히려 가족관계에서 서로를 더 이용하기도 하고, 남일 때는 지키는 선을 넘는 경우도 많아요. 책의 말미로 갈수록 사회적으로 보편화 되었을 때 상상할 수 있는 것을 많이 이야기해주셔서 좋았어요. 이것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고, 사회의 틀로 제도화되어야 한다고 보시는데, 인터뷰에서 1인 가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권자가 되었을 때 훨씬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도 흥미로웠거든요. 가족 단위로 묶였을 때 훨씬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 물정의 사회학』에서도 개인의 성찰이나 문제에서 시작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를 부추기는 기제와 문화에 대해 성찰하고, 나만이 아니라 우리와 연결된 개인의 판단이나 실천에 관해 이야기 하셨어요. 그러면 이런 메시지가 대학 같은 교육기관에서 어떻게 소통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지만, 20대에게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좀 막연하게 느껴졌어요.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하시나요? 요즘의 연애 문화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보면,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있어도 소개팅을 한다고 하거든요. 왜냐면, ‘신발 사러 갈 때 신발 벗고 가느냐’ 하거든요.

노명우 좋게 말하면 자유로워진 거고, 옛날 기준으로 말하면 책임감이 적어졌다고 할까요? 그런데 한편으로 측은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없는 순간을 하루도 못 견디거든요. 서로 많이 좋아하는 게 아니어도 그냥 만나는 거죠. 그러니까 관계가 일시적이고 불안해요. 항상 연애하지만 연애의 절박한 감정들을 몰라요. 지원 대학 1지망, 2지망을 선택하듯이 미지근한 관계를 이어나갈 뿐이죠.

조재원 진로를 결정하는 데도 어장관리 하는 것처럼 하나를 선택해 매진하기보다, 여러 곳에 여지를 두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태도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어요.

노명우 무기력과 함께 아이들은 스스로를 믿지 못해요. 언뜻 발랄한 것 같지만, 촘촘히 스케줄이 짜인 사춘기를 보내면서 자기 시간 없는 삶을 살다보니 내재된 스트레스와 불안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대학에 들어오면 해방감을 느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보이지 않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고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서툴러서 심리적 공황이 큰 것 같아요.

조재원 혼자 사는 인구가 많아지는 시기에 혼자가 될 그 친구들이 과연 합리적 의사결정 주체의 개인이 될지가 우려돼요. 그런데 이 우려가 내가 꼰대라서 그런 것은 아닌지, 내가 잘 몰라서 그런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아요.

노명우 저도 예전엔 우려 이야기를 안 하다가, 해야 한다는 쪽으로 바뀌었어요. 다들 꼰대가 될 것 같아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하지만, 분명 문제이긴 하거든요. 요즘 세대의 한계가 있는데, 그 부분을 누구도 지적하지 않아요. 한계는 지적하지 않고, 안아주는 이야기만 하는 거죠. 물론 지금 친구들에겐 위로가 필요하지만, 그들이 가진 경험의 한계도 짚어줘야 해요. 왜냐면 그들보다 나이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부분을 이야기해줘서 그 한계가 보완된다면 좋은 거니까요. 그런데 이런 조언과 쓴 소리의 과정을 꼰대가 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면서 입을 닫는 거죠. 그러다 보면 이 친구들은 그런 상황에서 더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혼자 사는 것, 함께 사는 것

분량9,702자 / 20분 / 1장

발행일2014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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