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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시대정신, 그 충돌과 섞임

임옥상 × 강영민

임옥상과 강영민 작가는 하나로 묶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민중미술 작가와 팝 아티스트는 생뚱맞은 조합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SNS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업에 끌어들여, 집요하면서도 재기발랄하게 예술과 사회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도다. 막상 이들은 만나자마자 불꽃이 튀었다. 냉소주의 시대에 예술이 가져야 할 정치적 뜨거움이 이들을 묶었다.


임옥상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학원, 프랑스 앙굴렘 미술학교를 나왔다. 뉴욕 얼터너티브 뮤지엄, 가나아트센터 등에서 14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현실과 발언 동인전, 광주, 베이징, 퀸즈랜드 비엔날레, 트리엔날레 등에 출품했다. <당신도 예술가>, <하늘을 담는 그릇>, <무장애 놀이터> 등의 공공미술과 도시농사, 세계문자축제 등의 이벤트를 기획, 감독하고 있다.

강영민 팝아티스트 강영민은 그의 대표적인 캐릭터 ‘조는 하트Sleeping Heart’로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활동해 왔다. 최근엔 팝아트조합을 결성하여 현대사투어를 기획하는 등 소셜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다.

진행 박성태 본지 편집인


한국의 컨템포러리아트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나

임옥상 페이스북(이하 페북)에서 강영민 작가를 봤는데 아주 매력적이야. 신변잡기를 주로 올리지만, 정치적인 얘기도 정확히 짚어내서 한 번 만나야겠다 싶었지.

강영민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한국미술계 현장에서 활동하셨으니 저는 선생님을 익히 잘 알고 있죠. ‘팝아트조합’에서 <팝아트투어>를 하면서 현대사를 돌아보고 있는데, 작년에는 전태일 기일에 청계천을 찾았습니다. 그곳에 있는 전태일 동상을 선생님이 만드셨으니 투어에 함께 해주시길 부탁드렸죠.

임옥상 좋은 기회를 줄 테니 와서 점심을 사라고 했었지. (웃음)

강영민 맞습니다. 그때 동상 제작과 관련해서 비화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기일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기념행사도 없었어요.

임옥상 공교롭게도 그 전날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전에서 내 작품이 철수된 다음날이었고요.

강영민 ‘임옥상 작가 개인전을 하나’, 싶을 정도로 개관전과 관련해서 선생님 얘기밖에 안 나오더군요. (웃음) 그런데 이거 초유의 사건 아닌가요? 작품도 안 냈는데 전시의 주인공이 됐잖아요.

임옥상 사건 자체는 (내 생각엔) ‘태풍의 눈’ 수준이었는데 ‘찻잔 속 풍랑’으로 끝나고 말았어요. 이후에 초유의 사건이 또 벌어졌는데, 한국미협과 민미협이 미술관을 상대로 데모했단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도 “당국에 의해 출품된 작품이 강제 철거”당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나왔어요.

강영민 미술계 각 진영이 대동단결했는데, 임옥상 때문에 모였는데, 임옥상으로 단결하면 안 되니까. 거기서도 논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된 거죠. ‘먹고사니즘’만큼 센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거죠. (웃음)

임옥상 밥그릇 싸움했잖아요.

강영민 저도 그때 관련 기사를 페북에 열심히 실어 날랐는데, 그걸 본 《시사인》의 고재열 기자가 제게 서울관에 잠입취재를 하자고 해서 선글라스를 끼고 갔어요. (웃음) 들어가자마자 동학 관련 작품이 있어요. 서용선의 <동학농민운동>으로 시작해서 박생광의 <전봉준>으로 끝나거든요. 그렇게 수미쌍관법을 지켰어요. 하지만 임옥상, 신학철 작가처럼 현대사를 직접 건드리는 작품들은 빠졌어요. 이게 이 사건이 갖는 중요한 메시지인 거예요. 즉 우리 현대사, 시대정신, 컨템포러리는 동학에 머물러 있다는 거죠. 그래서 동학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올해가 갑오동학혁명 120주년이거든요.

임옥상 전시 이야기를 덧붙이면, 서울관은 동학을 콘셉트로 잡았다고 강변했지만, 본래 기획했던 것도 내가 보기에는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없어요. 갑자기 당국에서는 이걸 빼라 저걸 빼라 하고, 사람들을 어떻게든 설득해야하니 날조한 거죠.

강영민 그 사이에 현대의 풍경은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것을 보여주는 정서죠. 임옥상, 신학철 작가는 인물을 그리는데, 전시에 선별된 작업들은 공통적으로 인물이 없어요. 건물만 있거나 뒤로 돌아있거나 하는 식입니다. 전시장 벽면에 시대정신에 대한 ‘기획자의 변’이 재미있어요.

“‘시대정신’이란 상황과 실존에 대한 ‘깨어 있음’의 태도다. ‘깨어있다’는 것은 곧 비판정신이다. 비판이 없는 지성은 공허하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비판이 있기에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가 가능하다. 미술도 그렇다.”

임옥상 아주 궁색한 변명이죠.

강영민 고재열 기자랑 같이 발견한 것이 몇 개 있어요. 가령, 장영혜중공업의 작품에 등장하는 텍스트 중 “빨갱이”는 모두 “빨X이”로 표기했거든요. 그래서 고 기자가 작가에게 이메일로 물어보았더니, 장영혜 왈 “노코멘트”. 어쨌든 우리는 이런 사태가 안타깝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그런데 그들의 목적은 그리 심각한 건 아니에요. 그냥 ‘심기 관리’ 차원이에요. ‘그분’이 오시니까요. (웃음) 원래 미술의 기본적인 기능이 심기를 관리하는 것에 있죠. 음악도 풍악을 울려주는 것처럼, 그런 예술의 전통적인 기능으로 돌아갔다고 봤죠. (웃음)

민중미술과 팝아트의 ‘대중’이라는 교차점에서

임옥상 강영민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작업을 하는 지 궁금해요. ‘팝아트조합’과 페북을 작품 활동의 연장선으로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흥미롭고요.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 활동, 지향점, 실현과 전개방법 등을 페북을 통해 알리고 사람들을 모으는 것 같은데 말이죠. 보통 팝아트 하면 60~70년대의 미국식 팝아트를 생각하고 그 범위 내에서 스스로를 규정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 것을 벗어나서 말 그대로 ‘대중 속의 예술이 어떻게 존재해야 마땅하냐’, ‘대중을 움직이는 코드가 무엇이냐’와 같은 절대 단순하지 않은 것들을 곳곳에서 잘 짚어주는 것 같아요.

강영민 SNS야말로 뉴미디어잖아요. 작가로서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죠. 예전에는 뉴미디어라고 하면 디지털카메라, 캠코더, 인터넷 정도로 생각했죠. 저 역시도 페북을 처음 쓸 땐 전시 소식, ‘먹방’ 같은 것을 올리며 소극적으로 사용했어요. 그러다가 지난해 대선 즈음 되니 정치적인 얘기들이 많이 올라오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런 게 SNS인가 보다. 이래서 소셜이 붙나 보지?’ 했죠. 페북을 쓰는 사람들을 크게 정치파와 탈정치파로 나눌 수 있어요. 우리 팝아트조합파는 아무래도 탈정치파이기 때문에 부단히 ‘먹방’과 ‘셀카’를 올렸죠. 그런데 아무리 성향이 다르더라도 저 둘이 마주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만화경같이 여기저기서 시기, 질투 그리고 온갖 영욕이 다 펼쳐지는 전방위적인 감정의 교류들이 너무 재밌는 거죠. 지금 대한민국 사회가 자본주의가 심화하면서 과거의 공동체, 사회 개념이 없어졌잖아요. 거기서 어떤 결핍이 이 사이버 공간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뉴미디어가 만든 뉴소사이어티에서 활동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공통 관심사가 뭘까’ 하던 찰나에, 대선에서는 박근혜 후보자가 덜컥 당선되니 그때 어떤 위기감이 들었고, 동시에 우리가 박근혜 대통령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현대사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미술사도 보게 되고 민중미술도 다시 보게 된 거죠. 역사라는 게 공동의 기억이다 보니 어떤 공동체를 만드는 주요 인프라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조금씩 관심을 가지면서 공간의 갈등을 시간축으로 풀어 보면 어떨까 했어요.

임옥상 그럼 SNS를 시작한 것과 협동조합을 만든 게 얼마 안 되었군.

강영민 SNS는 한지 약 2년 됐는데 “너 역시 오타쿠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공부한 흔적을 다 올리고 의견도 구하니까. 그러던 어느 날 최범 선생님이 댓글을 달아주신 거예요. 처음엔 놀랐고, 이후부터 주거니 받거니 얘기를 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최범이 왜 거기 가 있어? 강영민이 왜 최범하고 있어?’ 하며 관심을 두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팝아트와 민중미술은 서로 상치되는 장르이니 저랑 약간 안 맞는 조합이었죠. 최범 선생님과는 그렇게 온라인에서 친해져서 오프라인에서 만났는데, 선생님도 “관심 있어서 재밌게 보고 참 좋았는데. 그런데 팝아티스트라며? 왜 하필?” 하시더라고요. (웃음)

임옥상 종래의 팝아트는 경계의 대상, 경계 정도가 아니라 우리한테는 아주 미제 (웃음), 소위 상업주의 상품 문화를 전파하는 첨병이었잖아. 그런데 강 작가를 지켜보면서 ‘이 친구가 진솔하게 대중문제를 끼고 있구나’ 했어요. 나도 오래전부터 SNS를 관심을 갖고 활용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트위터를 떠났어요. 계획적으로 트위터에서 투표 인증도 받고, 선물도 주고, 또 그걸로 그림도 그리고 배포도 했고. 그런데 트위터는 그냥 배설만 하지, 어느 누구도 자기가 싼 걸 치우지도, 점검도 하지 않아. 게다가 그냥 흘러갈 뿐이니 성에 찰 수가 없지.

강영민 선생님이야말로 트위터를 가장 전방위적으로 사용하는 작가시죠.

임옥상 나와 같은 방식으로 매체미술을 하는 사람을 우리나라에선 미디어아티스트로 취급을 안 해요. 미술관이나 화랑에서는 영상 틀고 인터랙티브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미디어아티스트인거야.

강영민 외국에서 캠코더를 가지고 공항에 도착해야 해요. 그래야 미디어아티스트가 되죠. (웃음)

팝아트조합, <전태일과 팝아트투어>, 2013. 11. 13. / 자료제공: 임옥상

예술가의 전위성은 왜 실종되었는가

임옥상 예술가가 뒤처져 있다는 얘기는 이번 사태만 봐도 맞는 말이죠. 그날 서울관에 데모한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개의 미술 단체가 모여서 하는 것 봐요. 문화 예술계 사람들의 의식 자체가 기본적으로 정치하고 관계없이 놀아야 한다고 스스로 단정하는데, 겉으로는 비정치를 선언해놓고 뒤로는 정치권력에 유착하는 거죠. 미술 기관이나 주요 기관뿐만 아니라 대학교수들도 주류 제도권에 속하잖아요. 대학교수는 그걸 더 확대재생산 해서 팔아먹고요. 어떻게 누구를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요. 악순환의 고리가 너무 견고한 거죠.

강영민 아주 공고하죠. 미술은 정치랑 관련이 없어야 한다고 대놓고 얘기해요.

임옥상 한 예를 들어,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앞의 조너선 브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은 좌파(?) 작가의 대표적인 작업입니다. 노동 탄압으로 문제가 많았던 기업이 비싼 돈을 들여서 노동을 찬양하는 작품을 사서 거기에 세워놨어요. 나는 그 작품을 보면 반복되는 일상 속 노동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고, 노동자를 계속 때리는 것처럼 보여요. 두드러진 자본가들의 컬렉션은 미니멀리즘 작품 일색인데다 외국 작품만을 선호하잖아요.

강영민 이우환 작가의 대표 작품이 그래서 만날 신문에 ‘억’ 소리를 내면서 나오잖아요. 네티즌들은 ‘점 하나 찍었는데 이게 왜 10억이냐’ 하고요. 그런데 중국은 정확히 10배거든요. 전 미술 전문가들이 가격을 매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한번은 제가 페북에, “나는 한국 미술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한국적인 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하니까 임민욱 작가가 “국제 시대에 한국이 무슨 상관이냐. 당신이 얘기하는 한국 미술의 발전이 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임옥상, 신학철, 홍성담과 같은 민중미술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박서보, 이우환의 작품들보다 비싸지는 거다”라고 했어요. 실제로 외국에서, 특히 중국과 독일은 자기 이야기를 증언하는 작품들이 가장 비싸거든요. 그들은 민중미술을 국가가 전략적으로 밀어주는 반면, 우리는 철저하게 배제해요.

임옥상 예술 작품을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로 보려하지 않고, 이것이 나에게 득이 되느냐 안 되느냐,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느냐 하지 않느냐, 이런 기준에서 쳐내버리니까 무미건조하고 무색무취한 쪽으로 가는 거죠.

강영민 결국은 미술계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예술계 전반이, (아마 건축계도 비슷할 거예요) 사사롭게 결정돼요. 그야말로 심기 관리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니 비평도 시대와 사회의 맥락을 못 잡고 인상 비평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요. 이런 현상이 한국 사회에서는 탈정치를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억압에서 오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런 건 체제를 공부하신 분들, 지식인들이 더 민감하게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체제에 종사하는 게 출세하는 일이고 잘 되는 길이죠.

임옥상 한 예술 평론가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이우환 선생이 국립현대미술관 대중강연에서 자기야말로 ‘가장 정치적이었다. 독재와 군부세력에 맞서는 방편으로 점을 찍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나름의 저항이었다’고 얘기했다는 거야. 얼마나 멋있어요? 완전히 득도한 경지잖아요.

강영민 괜찮죠. 말 되죠. 예술가가 그렇게 얘기하면 믿어줘야 해요.

임옥상 근데 그렇게 얘기한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문제죠. 일테면, ‘그게 무슨 정치적 저항이냐?’는 질문이 나와 줘야 이야기가 이어질 텐데 거기서 멈춰버린 거야. 내가 평론가였다면 작가의 말을 받아치지 않을 이유가 없을 텐데, 특히 이우환 같은 권력과는 싸워서 좋을 게 없으니까.

강영민 저는 이우환 선생님의 말을 믿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는 치열하게 정치적이셨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말씀대로 작가가 그런 말을 하면 공론의 장으로 가져와서 논쟁이 되어야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걸 안 보려고, 투명인간 취급해버리면 우리 역사와 미술사가 믿음을 가질 수가 없죠. 결국은 이우환 작가 본인도 피해를 보는 거예요.

임옥상 어, 여기서 갈라지네. (웃음) 내가 보기에 그분은 그냥 미학적 점을 찍었을 뿐이야, 사실 그런 식의 고해성사를 한 이유는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들어서 일종의 심리적 위축, 위기의식이 발로가 된 것으로 봅니다. 이런 민주화판에 ‘너는 뭐했느냐’는 소리를 자꾸 들으니까 자기 합리화를 한 것이 아닐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정치 모리배들에 의해 민중이 탄압되고, 역사가 왜곡되고, 남북분단이 고착되는 상황 속에서 한 명의 예술가로서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한 최후의 수단으로 점을 찍었다면, 오늘날 그런 모습으로 존재할 수가 없지. 이우환 작가와 함께 활동했던 작가들은 유신시대에 공개적으로 박정희 대통령 찬가를 부르며 반민주화에 앞장을 섰다고. 유신을 찬양하고 긴급조치를 환영했어요.

강영민 그건 그분 자유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거예요. 즉 논쟁의 부재는 이우환 작가의 몫이 아니라 그 미술 사회의 몫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미술 사회가 그걸 철저히 방기하며 이우환의 가치를 소멸시키고 있죠. 이우환 작가도 그래서 한국 미술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요.

임옥상 강영민 작가가 좀 건너뛰는 것 같아 덧붙이면, 우리나라 미술계는 뿌리 깊은 식민성에 갇혀 있어요.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해요. 일제의 식민화 수단으로 출발한 ‘선진’, 그리고 한국전쟁 후 미국 CIA의 공작의 일환으로 지원을 받으며 시작된 비구상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한국미술은 자신을 위해 예술적 이상이나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 작가 활동 자체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우환 작가나 일련의 작가들이 그 반대쪽을 인정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은, 아니 당국과 함께 이를 타도의 대상으로 공동보조를 취한 것은 결국 그렇게 해야 자신들의 입지가 확고해진다는 계산된 자구적 판단의 소산일 겁니다.

강영민 그렇죠. 이게 얼마나 큰 손실이에요.

임옥상 그래서 내가 그런 문제에 의식을 갖고 ‘다른 장르를 한번 쳐다보기’로 했어요. 영화, 음악, 책 등은 그래도 미술처럼 이렇게 엉망이지는 않거든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대중의 점검이 있으니까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 영화를 만들고 홍보를 하더라도, 또 평론가들이 최고의 작품이 나왔다고 떠들어도 대중들이 ‘웃기네’ 해버리면 끝이란 말이에요.

임옥상, <하나됨을 위하여>, 종이부조, 235x266mm, 1989. 본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개관전인 《자이트가이스트-시대정신》 에서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해 동학농민운동으로 끝나는 전시 동선을 구상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전시가 시작되기 직전에 제외됐다. / ⓒ 임옥상

물신숭배와 자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예술

임옥상 강 작가가 팝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도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미술은 물건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부자에게 비싸게 팔려나가면 끝이야. 파급력도 미미하니 대중들이 감동하는 스토리가 있을 수 없어. 오늘의 작가들이야말로 대중 속에 파고들어 그들과 지지고 볶아야 그속에서 씨앗이 나올 수 있게끔 해야한다고 봐요. 물신숭배에 빠져 ‘부자가 내 그림을 사주지 않을까’ 하다보면 굶어 죽기 딱 좋다는 거지.

강영민 권위주의 체제는 자본이 들어오면 무너지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80년대에는 공동체가 살아있었으니, 미제, 외세, 자본주의와 같은 것에 당연히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어요. 자본이 들어와서 항상 제일 먼저 하는 행위가 공동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잖아요. 일단 공동체부터 해체시키고 개인을 원자화해요. 그런데 저는 엑스세대잖아요. 70년대 생들은 아주 소비적이거든요. 이미 자본이 공동체를 접수해버렸고, 그런 환경을 자연으로 생각하고 자라온 세대예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90년대 문민정부를 비롯한 87년 체제부터 민주화가 진행된 과정이 사실은 자본의 침투과정이에요. 그래서 저희는 자본의 좋은 점을 알아요. 이게 과거 세대와 다른 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자본이 들어오면 많은 것들이 갱신되고 권위가 없어지면서 젊은 작가, 젊은 세대들일수록 대중문화와 자본주의를 좋아해요. 왜냐하면 권위적인 것을 깨뜨릴 수 있으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대중매체와 영화의 권위를 깰 수 있는 거예요. 지금이 권위적인 정권이지만 소비대중들이 몰리면 깨지는 거죠. 인기가 있으니까. 어차피 제작사나 비즈니스맨들은 돈이 중요하잖아요. 자본은 이윤을 내는 것이 중요하지 진영이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오히려 냉전이 끝나고, 공산진영이 몰락하고, 자본이 완전히 헤게모니를 잡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더 심화되어야 된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예를 들면, 임옥상, 신학철, 홍성담의 작품이 이우환, 박서보의 작품보다 비싸져야 한다는 거죠. 자본주의가 더 심화한다면 그렇게 가는 것이 맞는다는 거죠.

임옥상 근데 우리나라는 그게 엇박자잖아.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권위적인 정권이 아직은 자본의 힘보다 우위에 서 있다고 보는 거예요. 여기서 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가 2만 불 시대에 진입했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통계상의 수치일 뿐 내용상으로 보면 소득불균형이 너무 심화되어서 사실은 2만 불 시대로 대표되는 문화사회적 현상이 나타날 수 없어요. 소득이 낮은 계층일수록 권위적 정권에 투표하는 성향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또 서울의 경우, 강남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소득은 5만 불 수준일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세의 성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느 때 도적 떼들이 자기의 부를 빼앗아 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분단국가라는 변수가 작용하고 지역주의가 겹치고 중국과 미국이 맞서는 초강대국의 최전선이라는 지정학적 문제가 또 덮쳐요. 자본가들의 입장에서도 힘들 겁니다. 탈이념으로 무장해제를 시키고 대신 소비의 묘약을 먹여야 하겠는데 의식으로 무장한 시민세력이 이를 좌시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차라리 완전 보수 편에 서는 것이 현명한 처세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주변국에 신경 쓸 시간이 없어서 계속 등장하는 것이, 북한 즉 분단을 계속 새롭게 포장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에게 2만 불 시대는 왔더라도 아직은 ‘춘래불래춘春來不來春’이라는 것이죠.

강영민 자본이 세지면 선생님의 작품이 제일 비싸질 거예요. 명약관화明若觀火해요.

임옥상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자본이 저쪽(정권)의 눈치를 안 볼 수 없거든요. 삼성이 신학철 작가의 작품을 사고 싶어도 당국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는 거죠. 국민들이 자본화되었다고는 하나 전일적으로 자본화되지는 않았어요. 그걸 알고 정권이나 여당이 종북을 자꾸 양산하고 팔아먹는 거죠. 이게 아직 게임이 되거든. 그러나 이게 좀 더 바뀌면 “웃기는 얘기하지 마라”가 될 건데.

강영민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가 가장 팽배한 국가라 전 세계 학자들의, 특히 좌파 이론가들의 초유의 관심사죠.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제가 말하고자 하는 심화라는 것은 이 다음 단계입니다. 기승전, 클라이맥스에서 떨어지잖아요. 자본주의로 받는 고통이 이 정도의 막장으로 가면 이게 심화되어서, 꺾여야 하는데 끝도 없이 가는 거예요. 그게 가장 전위적이라는 거죠.

임옥상 맞아. 자본이 흐물흐물해져야 하는데 여전히 발기 상태로 달려가는 거예요.

강영민 그렇죠. 우리가 말하는 심화는 발효단계, 여무는 단계인데 아직도 서슬 퍼렇게 껄떡대면서 가는 거예요. 도대체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강철 멘탈이라서 이렇게까지 갈 수가 있나요?

임옥상 앞서 얘기한 것처럼, 소위 2만 불 시대가 되면 우리가 서구화의 상황과 똑같이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라 해도, 문화와 같은 여러 징후들이 비슷한 상태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 그림을 이때쯤 되면 사야 하는데 안 사고, (웃음) 작품 값이 좀 더 뛰어야 하는데 안 뛰고, 집에 가면 벽이 좀 허전하다고 느껴야 하는데 전혀 못 느낀단 말이에요.

강영민 이게 연구자들이 주목하는 이유죠. 드디어 한국 사회에 변곡점 같은 것들이 가시화되는 시기거든요.

임옥상 그런데 주위에는 패배주의자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요. 식민지 시대는 끝났는데 내적 식민지에 살고 있어요.

자발적인 욕망의 삭제

강영민 여전히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은 선생님이 특이하신 거예요. (웃음) 선생님, 희망의 반대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임옥상 절망이지. 더 정확히 말하면 자포자기.

강영민 맞아요. 80년대는 희망과 절망이 계속 엇갈리는 굉장히 ‘핫’한 시대잖아요. 그리고 90년대는 격렬하게 욕망하고 희망하면서 승리를 쟁취한 다이내믹한 시대였거든요. 그런데 지금 젊은 세대들은 절망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것을 알아버렸어요. 절망에도 카타르시스가 있잖아요. 패배주의의 카타르시스. 그래서 무기력해졌어요. 자포자기 같은 거죠. 사람들이 욕망을 버리면 마음이 좀 편해지죠. 그때 자본주의의 달콤한 것들이 침투해요. 지금은 능력에 따라 어느 정도 돈만 있으면 많은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누릴 것들이 많거든요. ‘386 민주화 세대’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위대한 세대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위대함에 대한 욕망이 없어졌어요. 사사로워진 시대죠. 대화가 약간 세대론으로 가는 것 같지만 이어 말하자면, 그때 저희 세대가 부상한 이유에는 어떤 민족의 미션이라든지 민족 공동체의 목표와 같은 거대 담론들이 무너진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공동체가 녹아내리고 개인이 발견되기 시작했거든요. 자본이라는 것은 공동체를 깨트리고 개인에 침투하니까 개인의 개성이 주목받기 시작했죠. 80년대는 개인이 필요 없는 시대에요. 조직의 세포에 불과했죠. 일상도 무시당했고요. 개인의 발견으로 인해 일상이 발견되는 시기, 그때부터 진짜 개인의 내면으로 심화된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가 시작됐다고 봐요. 그리고 민주화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도구tool입니다. 누가 칼자루를 먼저 잡느냐가 이 싸움의 관건인 거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기업들은 민주주의를 도구로 썼죠. 그러면서 자본의 맛을, 소위 다들 돈맛을 알기 시작한 건데, 그걸 모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임옥상 그것도 이제는 어느 정도 십수 년이 지나다 보니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하잖아요. 이게 아주 달콤했는데, 돈이 없으니까 전혀 달콤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기 시작해가는 과정이라고 봐요. 거기에 오는 상대적 박탈감에 가위눌리고 있지요.

강영민 2000년대부터 알았죠. IMF 터지면 부자도 하루아침에 망하고 변수가 많구나. (웃음)

임옥상 그게 잘 가면 숙성이 될 텐데 다른 요소들이 개입해서 잘 안 된단 말이지. 자본은 세대 간의 갈등을 잘 관리하잖아요. 사람들의 욕망 수준은 굉장히 높아졌는데 욕망을 채울 방법이 자꾸 없어져 가니까 이걸 정치적 또는 노동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어요.

강영민 그런데 중간계급의 심리 메커니즘을 더 섬세하게 볼 필요가 있는데, 무기력 코드와 냉소주의, 바야흐로 냉소주의의 시대입니다. 마치 최루가스나 바이러스처럼 다 퍼져서 내면화되어 있어요. 옛날 계몽주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깨우치면 비로소 행동할 힘이 생겼는데 지금은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다 알면서 안 하거든요. 그게 냉소주의의 본질입니다. 사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사태도 미술계에서 엄청나게 큰일인데 그게 연결이 안 되죠. 100배 더 큰 일이 일어나도 냉소주의에 절어있어서 ‘아,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거나 SNS에 반짝 이슈가 되어 ‘좀 재미있네’ 하고 말겠죠. 기승전결의 사이클이 하나 끝나서 결론은 망했다는 걸 다들 알고 있는데 왜 저러나 싶은 거죠. 선생님은 다시 시작하고 싶으신 것 아닌가요?

임옥상 그렇지. 내가 원하는 건 다음 단계로 가는 거야.

강영민 다시 계획을 세우는 거고. 팝아티스트들은 미술계에서 누구보다도 친자본주의적인 작가들이에요. 상업주의에 절어 있는데 한술 더 떠 그걸 자랑하죠. 그러니까 얼마나 얄밉고 생각 없어 보이겠어요. 그 사이클은 시작하는가 싶더니 이미 끝났는데.

임옥상 어떻게 보면 새로운 팝아티스트, ‘뉴 팝아트’지 이것은 종래의 팝아트가 아니야.

강영민 지금부터는 다시 처음에 서는 거죠. 그래서 근대도 다시 발견해야 하고요. 제가 그때부터 민중미술에 관심이 생겼어요. 처음부터 첫 단추가 잘 끼워져야 하잖아요. 근데 대한민국에서 어디서 첫 단추가 맞게 끼워졌느냐, 바로 민중미술에서부터예요. 그 이전까지는 입양문화, 번안문화라고 하죠. 그런데 자기 배 아파서 울컥 낳은 것이 민중미술이에요. 물론 좋은 종자 입양해서 키운 똘똘한 놈보다 뭔가 좀 떨어질 수 있겠지만, 거기서 뭔가 순정한 게 나왔어요. ‘Made in Korea’가 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저희 세대에 어떤 미션이 있다면 우리 배 아파서 낳아야 하고, 이것을 우리 자산으로 잘 가져서 원래 있었던 민족이라는 것의 새로운 버전, 민족미학을 중시했던 민족문화진영의 자산을 계속 갱신해야 한다는 의지일 겁니다. 그래야 그게 비로소 전통이 되거든요. 그 지점에서 선생님 세대와 저희 세대가 만나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재벌 작가시죠, 스타 작가시고. (웃음)

임옥상 나를 자본가와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작가라고 할지도 몰라요.

강영민 임옥상에 대한 오해는 정말 많고요. 저도 공부가 부족해서 자세히는 몰랐어요. 뭘 하셨는지 다는 모르지만 그냥 스타. (웃음)

임옥상 그런데 나는 자본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예술가는 예술가가 아니라고 봐요. 제일 좋게 얘기하면 자본을 엎어치기 할 수 있는, 자본의 힘을 역이용하는 능력을 동시에 갖춰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능력이 없으면 철저히 거부해야 하고. 자본과의 각을 세우고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진정한 작가지.

강영민 그게 핵심이죠. 사실 민중미술은 80년대에 끝났다, 아니 90년대다 하는데, 저는 지금까지 그 미션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고 봐요. 민중미술의 대표적인 여러 좋은 작품들이 많은데 그중에 오윤의 <마케팅> 연작을 보면 코카콜라 같은 것이 많이 나오거든요. 소재로 본다면 완전 팝아트에요.

임옥상 그럼. 그때 우리 다 팝아트 했어. 나도 팝아트-대중미술 한다고 했어. 근데 우리나라는 작가들이나 전문가들이 고집스럽게 대중미술이라는 말 안 쓰려고 해요. 팝아트라고 쓰고 싶어 해요. 왜냐면 대중미술이라고 쓰면 격이 떨어진다 보거든. 팝아트라고 해야 서양이 하는 예술이거든요. 미술은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미술이 되어야 해. 나는 새로운 대중미술의 출발점을 강 작가가 잘 개척하고 있다고 봐요.

강영민 저는 작가로서의 야망도 있고, 이전 것을 지금에 맞게 갱신하고 기여하겠다는 욕망도 있어서 선생님과 만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민중미술의 어떤 미션이라는 것은 그게 우리나라 민족진영의 미션이기도 한데, 우리가 자본에 굴하지 않겠다는 거죠. ‘우리가 자본의 고삐를 쥐고 끌고 가겠다’는 모든 작가들의 로망이 있죠.

임옥상 자본에 먹히는 순간 예술은 사라져요. 아무리 비싼 작업이라도 작가가 작업을 끌고 갔느냐, 아니면 엎드려서 돈 받아낸 작가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지. 나는 진정한 작가라면 그걸 리드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당신에겐 안 팔아’라고 할 수 있어야 해요. (웃음)

강영민 작가들이 가져야 하는 제일 중요한 요소가 돈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에 대해 모르니까 무서운 거거든요. 한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미술시장의 논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면 겁날 게 없어요. 지금 미술계 내부 얘기를 하자면, 전통적으로 원래 미술이라는 것 자체가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성직자 그리고 귀족 같은 돈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거거든요. 이게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이른바 근대성에서부터인데, 대한민국도 전통적 미술의 기능에서 잠깐 엇나갔던 시기가 80년대에 있었죠. 이 불씨를 어떻게 잘 살려 나가느냐가 관건이라고 봐요. 근데 저는 희망적으로 보는 이유가, 자본주의라는 것이 그렇게 무식하지 않거든요. 요즘 나온 <또 하나의 가족>이나 <변호인> 같은 영화들은 사실 철저한 자본의 논리거든요. 자본이라는 게 무조건 착취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며 수준 낮게 움직이지 않아요. 그러면 외국 투자자들도 다 떠나고 한마디로 거지 국가가 되니까요.

임옥상 그러니까 정치가, 위정자들이 정말 잘해야 하는 게 그건데, 저들이 아직도 감을 못 잡고 저렇게 되지도 않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강영민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그분들이 잘해줘야 해요. 우리를 억압하지 말고 우리가 튕길 수 있도록 자유를 줘야 해요. (웃음)

임옥상 나는 나이를 먹는데도 불구하고 철이 없어서 그런지, 아직도 할 일이 굉장히 많고, 오히려 사회에서 나에게 준 미션이 나를 정말로 신이 나게 만들어요. 과거에 살던 미술판에 연연하지 않고 늘 새로운 영역에서 나만의 일을 발견하고 실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히려 한국 사회가 괴기하니까 더 자극을 받는 거 아니에요?) 어떤 면에서 보면, 한국 작가들이 진짜 행복한 거예요. 이 분단이라는 것도 장벽이지만, 그 이상으로 기회가 될 수 있잖아요.

강영민 행복한 사회는 예술이 필요가 없어요. 인생을 즐기면 되니까요. 한국 작가들은 아주 럭키한 거예요. 할 것이 많고, 저항을 잊을 만하면 자극이 들어오죠. (웃음) 철 안 들게 해주고. 작가로서는 최상의 환경이고 연구자들한테도 그렇고요. 그래서 지젝이 괜히 오겠어요. 이택광 선생님께 그쪽의 얘기를 좀 들었는데 아주 조용히 움직이고 있어요.

임옥상 문제가 많은 사회, 그것이야말로 작가들에게는 풍성한, 비옥한 땅, 대지지요. 이 비옥한 대지에서 얼마나 건강한 작가들이 자라고 있겠습니까.

강영민 방심했죠. 이분들이 지난 소위 잃어버린 10년 동안 10만 대군을 얼마나 치열하게 양성했는지 몰랐죠. (웃음) 냉정한 현실 인식이 있어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죠. 선생님은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세요?

임옥상 계획적으로 살아보지 않아서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도시농업(사) 운동, 이건 계속 진행될 것이고 또 올해 첫 삽을 뜨는 ‘세계문자축제(향연)’가 있어요. 사단법인으로 ‘세계문자연구소’를 출범시키고 문자를 타이포그래피 차원이 아니라 세계 문명사적인 입장에서 조명할 거예요. ‘문화다양성’이라는 말 아래에서 의미를 많은 이들과 체감할 수 있도록 행사의 가닥을 잡아가고 있고요. 아무튼 저희 화두는 공동체 속에서 나의 삶과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입니다.

예술과 시대정신, 그 충돌과 섞임

분량15,071자 / 30분 / 도판 2장

발행일2014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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