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공동체를 다시 생각하기: 갈등적 공공성과 재귀적 대표성
홍철기
분량5,687자 / 10분 / 도판 2장
발행일2014년 3월 31일
유형칼럼
실패한 것은 민주주의의 미래
우리는 이제 굳이 ‘정치적인 것’의 개념과 ‘경합주의’ 정치이론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공동체란 언제나 분열적이며 ‘공동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혹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이름에 걸맞게 둘, 혹은 그 이상으로 쪼개진다는 사실을 너무나 당연시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지난 대통령 선거 결과는 단순히 제도화된 정치의 장 안에서 경쟁하는 둘 혹은 그 이상의 정파 내지는 정당들 중에서 누가 더 상대적으로 많은 득표를 했는가의 문제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 선거의 결과는 공동체 전체의 분할 비율이 반영된 것이라는 인상을 승리한 측과 반대 측 모두에게 각인시켜주는 듯했다. 따라서 여전히 선거란 그 결과가 박빙의 불확정성에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기적 자유경쟁 선거를 민주주의의 핵심으로 보았던 절차적이고 이른바 ‘최소주의’적 관점 이론가들의 예측과 달리, 패자가 다음 기회에서의 승리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결과에 승복하는 아름다운 “민주주의의 기적”(아담 셰보르스키)을 더 이상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선거의 결과란 더 이상 공동체를 분할하는 본원적인 갈등과 적대의 차원 (‘정치적인 것’ 혹은 친구와 적의 구별)을 다원주의적이고 제도적인 ‘정치’의 차원을 통해 완화한 상대적 결과라기보다는 바로 ‘정치적인 것’ 자체의 절대적 표현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중정당의 쇠퇴와 함께 (하버마스의 말을 따르면) “거리의 압력”, 혹은 날 것의 사회적 갈등이 어떤 매개도 거치지 않고 완화되지 않은 형태로 제도 정치 안으로 유입되면서 정치와 정치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심지어 패자만큼이나 승자 또한 선거의 결과에 승복하거나 그 정당성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게 된다. ‘독재자의 딸’ 대통령 당선과 끝나지 않는 부정선거에 관한 논란은 분명 표면적으로 민주주의 실패와 유신 독재시대로의 회귀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외형적 유사성과 달리 본질적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바로 선거가 약속했던 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탈주술화’와 실망이다. 실패한 것은 민주주의 자체라기보다는 주기적 자유경쟁 선거가 약속했던 민주주의의 미래였다. 이러한 실망은 보다 능동적인 증오로 발전하는데, 자크 랑시에르의 적절한 표현에 따라 이중적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의 증오”, 즉 민주주의에 ‘의한’ 증오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바로 그것이다.
21세기 민주적 공동체와 제3의 신체
민주주의의 증오의 이중성, 즉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실망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으로부터 초래되는 동시에 이 부정적 정서가 다름 아닌 민주주의 자체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존의 약속 두 가지 모두를 상쇄시킨다. 민주주의에 대한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접근과 실체적이고 실질적인 접근 모두가 이 증오의 대상에서 예외가 되지 못한다. 민주주의의 증오는 공동체의 내부와 외부의 관계의 문제에 관해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기존의 접근 방식과 구분된다. ‘경합적 다원주의agonistic pluralism’라고 분류할 수 있는 이른바 ‘정치적인 것의 귀환’에 대한 경고와 탈정치화에 대한 비판은 적대의 폭력적 귀환의 가능성에 대하여 사회의 다원적 갈등의 강화와 보다 개방적인 시민권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경합적 다원주의는 여전히 공동체의 외부와 내부 사이의 단순한 이분법적 경계를 전제로 하여 공동체의 경계가 지나치게 폐쇄적이 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그러다 보니 정작 정치적인 것의 구조 자체가 안과 바깥의 단순한 이원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하고 말았다. 하지만 ‘역사의 종언’ 이후에 도래한 민주주의의 증오는 공동체의 안과 바깥의 관계가 단순하고 순수한 이분법적 관계가 아님을 나타낸다. 정치적인 것의 공간과 구조는 순수한 외부도 순수한 내부도, 혹은 이렇게 나뉜 안과 밖 사이의 보다 개방적인 변증법을 통해 정의될 수 없다. 문제는 안과 밖의 중간에 놓이는, 절대적 내부도 절대적 외부도 아닌 영역이다. 이곳은 조르지오 아감벤의 구분에 따르자면, 정치에 대한 참여의 권리가 완전하게 보장되는 자격을 갖춘 시민을 지칭하는 이른바 대문자 인민People과 완전히 자격을 발탁당하고 배제된 소문자 인민people 사이의 중간 영역이자 제3의 영역이다. 혹은 랑시에르의 용어로 바꿔서 말하자면 ‘정치politics’와 ‘치안police’ 사이의 영역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증오는 민주주의의 민주적 배제가 결코 순수한 외부, 혹은 현실의 적으로의 치환으로 귀결될 수 없다는 점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 증오의 대상이 민주주의 자체이며, 다시 랑시에르 본인의 말을 빌리면 인민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봤을 때, 현대 정치와 민주주의에서 결정적인 쟁점은 보다 폐쇄적인 국민국가 형태와 보다 개방적이고 상대적으로 세계 시민적인 성격을 갖는 열린 공동체 사이에서의 선택의 문제도 아니며 정치의 자격을 보장받는 시민과 그렇지 않은 이민자들 사이의 매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사이에 존재하는 대문자 인민도 소문자 인민도 아닌 세 번째 항, 혹은 피에르 로장발롱Pierre Rosanvallon의 용어를 빌면 “인민의 세 번째 신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시대이자 동시에 포퓰리즘의 시대인 21세기의 민주적 공동체를 다시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직면한 본질적인 도전 과제일 것이다.
공적인 영역이 사라진 자리, 사회적인 것의 영역이 갖는 가능성
여기서 우리는 또한 순수하게 정치적인 것의 관점에 내재한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보다 개방적인 시민사회, 혹은 구성원의 자격에 대한 열린 원칙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라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개방적인 시민사회와 폐쇄성에 반대하는 시민성만으로는 현재 당면과제인 공동체의 문제로서의 공공성의 문제를 다루기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에 대한 개방성만으로는 정치와 윤리 사이의 모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한 정치와 순수한 윤리는 일종의 악순환 관계를 형성하는데, 정치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사회만을 개방적으로 구성하려 할 때, 정치는 윤리와 규범의 문제로 대체된다. 반면에 사회의 개방성을 순수한 정치의 문제로 이해할 때, 다시 말해서 구성원의 자격의 개방성을 순수한 치안에 대항하는 순수한 정치로 이해하게 되면 정치는 다시 사회와 분리되면서 고립된 또 다른 윤리의 영역이 된다. 순수한 정치와 순수한 윤리는 그 순수성 때문에 결국에는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니체적 모순이나 스피노자가 말한 ‘국가 안의 국가’의 역설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난점은 순수한 정치와 순수한 윤리의 고립에만 있지 않다. 결국 이 경우에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완전히 분리되면서 서로 이름만 다를 뿐이며 실질적으로 공적인 것, 혹은 공공성은 사라지게 된다. 또한 이는 한나 아렌트가 도달하는 결론으로부터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가장 보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가능성이기도 하다. 아렌트는 한편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공적인 영역에서만 정치가 허용될 수 있다고 보면서 그 반대편에 순응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사적 영역, 혹은 (정치적인 것에 대해) ‘사회적인 것’의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후자에 의해 전자가 잠식되고 결국 사라지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최소한 추론의 과정에서는 아닐지라도 최종적인 결론에서는 전자와 후자를 완전히 분리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아렌트는 양자의 관계를 ‘확실성의 섬’과 ‘불확실성의 바다’, 혹은 ‘오아시스’와 ‘사막’의 장소적 구분과 대립 관계에 비유하였다. 후자의 영역에는 정치가 허용될 수 있는 자격이 없으며 오직 순응과 치안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드넓은 바다와 사막에 둘러싸인 섬, 혹은 오아시스로서의 공적 공간에서만 자유와 평등, 즉 진정한 의미의 평등한 동료들 사이의 자유로운 정치 행위가 허용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체 없는 공공성, 공중은 어떻게 공동체라는 사유로 구성되는가
현대 민주주의에서 공공성과 공적 영역을 잠식하는 위협은 그 외부의 사적 영역으로서의 사회로부터 오기보다는 오히려 공공성에 관한 고립주의적이고 자아도취적인 태도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시점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는 공적 제도의 외부와 내부를 마치 문명과 야만의 관계처럼 이해하는 폐쇄적 태도에 의해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태도와 원칙은 분명 시민사회의 개방성이나 폐쇄성의 여부와는 다른 문제를 발생시킨다. 외부로부터 고립되면서 오직 자신의 외부에 놓이는 사회 전체를 치안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제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제도’라기보다는 우리가 ‘조직폭력’이라고 말할 때의 의미에서의 ‘조직’에 가까워진다. 우리는 많은 공적 제도들이 공공의 이름만을 유지한 채 그 실제 운영에서는 조직에 가까운 형태로 전환되고 있는 상황을 겪고 있다. 정치의 자율성도 시민사회의 자율성도 해법은 아니다. 이미 정치의 순수한 자율성은 고립과 자아도취의 원인이다. 반대로 시민사회의 순수한 자율성의 이상은 자명한 ‘투명성’, 그리고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집착 혹은 물신주의로의 귀결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1920년대에 민주주의에서의 공중public의 실체성을 놓고 논쟁했던 월터 리프먼과 존 듀이의 논의로 되돌아가야 한다. 리프먼이 그 신체를 ‘유령phantom’에 비유했듯이 공중의 실체는 오직 사후적이고 반응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사회의 자율성은 규범적 가상에 불과하다. 그리고 듀이가 말하듯이 공중이란, 결정의 직접 이해당사자가 아니라 구체적 결정의 결과로부터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모든 이질적 주체들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한나 아렌트나 위르겐 하버마스가 생각했던 것과 같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의 무매개적이거나 혹은 매개 되면서도 자율적인 관계는 불가능하다. 공공성이란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사회에 의해서도, 혹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정치와 국가에 의해서도 확보될 수 없다. 정치적인 것의 귀환 이후에 공공성이란 정치와 사회, 제도의 안과 밖 사이의 복합적으로 매개된 이질적인 상호작용의 표면에서만 존재한다.
복합적으로 매개된 이질적 갈등과 긴장관계 없이 공공성과 정치적 갈등은 유지될 수 없다. 동시에 정부와 제도는 사회에 대한 대표성을 주장할 수 있지만 이와 같은 대표성이란 언제나 재귀적인 성격의 것으로 이해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제도의 내부에서 결정의 결과를 완전히 예측할 수 없고 시민사회가 외부에서 제도를 완전히 투명하게 감시할 수 없는 이유는 정치적 결정과 행위 자체에 내재한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에 있다. 요제프 슘페터가 정치적이고 공적 결정을 내리는 문제에 직면하여 일반 시민이 야만인과 같은 수준으로 능력의 저하를 겪게 된다고 한 말은 제도 내부에서 결정을 내리는 엘리트와 정책결정권자에게도 마찬가지로 확대 적용되어야 한다. 대표자와 제도에 의해 내려지는 결정과 행위의 결과가 이질적인 사회 구성원들에 미치는 간접적인 영향은 결코 사전에 예측될 수 없으며 오직 사후적으로 과학적이지만 동시에 정치적인 방식으로 측정될 수 있을 뿐이다. 공공성과 공중에 대한 이와 같은 접근 방식만이 ‘민주주의의 증오’라는 조건하에서 공동체에 관한 정치적 사유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홍철기
현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박사과정에서 「대의민주주의와 민주적 대표 개념」에 관한 학위 논문을 집필 중이다. 저서로는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 (홍태영 외 공저)이 있으며 역서로는 브뤼노 라투르가 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와 조르조 아감벤 등이 쓴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김상운 외 공역) 등이 있다.
민주주의 공동체를 다시 생각하기: 갈등적 공공성과 재귀적 대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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