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공동체, 분열 혹은 불륜?
심보선
분량6,564자 / 13분
발행일2014년 3월 31일
유형오피니언
예술은 어떻게 공동체에 가 닿는가
예술을 공동체에 연결시키는 가장 흔한 논리는 “예술은 고유의 재현적 규칙을 통해 공동체의 삶을 표현한다”라는 진술에서 잘 나타난다. 이 진술에서 “재현적 규칙을 통한다”라는 말은 예술적 테크닉을 발휘하고, 관습을 적용하고, 재료와 도구를 사용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논리에 따르면 예술은 ‘그럴듯함verisimilitude’의 방식으로 공동체를 재현하는 동시에 이 재현을 통해 바람직한 공동체를 구현하고 공공선에 기여해야 한다. 이 같은 재현론의 발의자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Poetics』 에서 재현할 수 있는 대상과 재현할 수 없는 대상을 구별한 것은 시적 재현이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미치는 도덕적, 정서적 영향력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만약 시인이 영웅이 아닌 악인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는다면, 그의 작품은 시민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며, 공동체의 질서와 규범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기원한 예술과 공동체에 관한 이러한 견해는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많은 학자들, 관료들, 예술가들, 관객들의 의식에 깊이 자리해 왔다. 한나 아렌트는 예술가, 시인, 역사기술가, 기념비 건립자의 도움으로 공공성은 기록되고 전승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들의 도움 없이는 행위하는 인간 활동의 유일한 산물, 즉 그들이 행하고 말한 이야기는 도대체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1 공동체를 기억하고 회복하려는 시도는 사실주의적인 예술 사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르코르뷔지에가 전자음악의 시조인 작곡가 에드가 바레스와 함께 1958년 엑스포에서 시연한 ‘전자시poeme electronique’는 “감각의 교향곡 a Symphony of Sensations”이라 명명되었는데, 그것의 목적은 관객들에게 “공동체 회복을 위한 절규”를 들려주고자 하는 것이었다.2 우리는 시야를 현대의 공공정책에까지 넓힐 수 있다. 지역의 파괴된 경제, 사회, 문화를 회복하려는 최근의 예술정책들, 소위 예술을 활용한 마을 만들기, 지역 재생, 도시 디자인 등의 다양한 이름을 가진 사업들도 실은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
현대 예술의 공동체, 삶의 복잡성과 개인의 개별성
이러한 기획들을 직간접적으로 옹호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은 현재 다양한 학문 분과에서 활동 중이다. 최근 자주 언급되는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이 대표적이다. 부리요는 관계미학이 개인과 집단 사이의 “새로운 결합, 구별되는 개체들 사이의 관계들, 서로 다른 파트너들 사이에서 창안된 연합”을 모색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술이 공동체에 기여하는 역할을 부각한다. 부리요가 큐레이터이자 미학이론가로 현대 예술의 공동체 전략에 주목한다면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은 시민들의 취미활동에서 공동체 회복의 이상을 발견한다. 그는 예술 동호회 활동이 사회자본과 시민적 덕목을 활성화함으로써 시민사회에 공동체적 토양을 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3 고백하자면 나 또한 공동체 예술, 공공 예술, 예술 동호회를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관계미학과 사회자본 이론을 꾸준히 차용해왔다. 이 이론들은 예술의 관계적이고 자율적인 측면을 부각하면서 시장 자본주의와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근간인 경제적 합리성 개념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최근 들어 이러한 대안 이론들이 예술을 ‘통치성’의 차원으로 포섭하는 데에도 유용한 지적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 생각은 『시적 정의』라는 책을 읽고 좀 더 뚜렷해졌다. 법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이 책에서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시적 정의란 공리주의를 주요 원칙으로 삼는 현대의 공적 합리성을 비판하고 보완하는 개념이다. 누스바움은 개인을 욕망의 상자로 보는 공리주의에 대비하여 “삶의 복잡성과 개인의 개별성”을 적극 고려하는 시적 정의를 공적 합리성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문학이야말로 시적 정의를 교육하는 가장 중요한 교재이다. 누스바움은 정의의 주요 책임자, 즉 재판관들이야말로 소설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논의를 정부 차원으로 확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정치인들과 관료들, 정책 입안자들이 문학을 접한다면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정부는 모든 시민들에게… 복잡한 삶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소설의 방식과 같이 규범이란 원칙적으로 시민들의 개별성, 자유, 각각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고자 하는 것임을 자각할 수 있다.”4
좋은 공동체, 좋은 예술?
요컨대 위에 소개한 미학자, 사회학자, 철학자들은 예술이 좋은 시민, 좋은 사회, 좋은 정부를 육성하고, 궁극적으로 좋은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핵심적 자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가? 나 또한 이 주장을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으며 때로는 적극 옹호해왔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만약 예술과 공동체에 관한 기획들이 오로지 좋은 공동체를 구현하는 좋은 예술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예술가들, 시민들, 사회단체들, 공무원들은 오로지 좋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사회공학’의 장에서 역할을 나누고 협력을 하는 파트너로 만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자크 랑시에르는 관계미학을 “이미 주어진 공동의 세계를 형성하는 대상들과 이미지들의 재배치”를 시도하고 “집단적 환경에 대한 우리의 시선과 태도들을 수정”하려는 노력이라 평가하였다. 그에 따르면 관계미학은 “비판적이고 고발적이라기보다는 아이러니하고 유희적인 양식으로 (중략) 새로운 대면과 참여의 양식을 유발”한다.5 관계미학에 대한 랑시에르의 비평은 퍼트남의 (예술적) 사회자본론과 누스바움의 시적정의론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 모든 견해들은 기존의 공동체와 그것의 구성 원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들을 미학적으로 세련되고 인문적으로 성찰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선으로 검토하고 교정할 뿐이다. 이 견해들은 예술을 통치성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왜 굳이 정부를 거부해야 하는가? 만약 정부가 진보적이라면 예술을 통해 더 진보적이 될 터이니 좋고, 만약 보수적이라면 그나마 예술을 통해 개선될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
주어진 삶을 부정하며 예술적 삶을 긍정하기
나는 여기서 공동체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전복적이고 유토피아적인 미학을 천명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예술에 빠져드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를 짚으면서 공동체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고자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예술가가 ‘미’를 추구하는 것은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고자 하는 사적인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미는 어떤 ‘관심’에서, 심지어 극히 강력하고 극히 개인적인 관심에서, 즉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고통 받는 자들의 관심으로 인해 마음에 드는 것”이다.6 여기서 예술가들이 벗어나려고 하는 고통의 근원은 바로 “강제노동과 수치심”이다. 사람들은 왜 예술을 추구하는가? 그들은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이 삶, 강제노동에 속박되고 수치심에 물든 삶을 견딜 수 없다.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되고 싶고 다른 곳에 있고 싶다. 그런데 니체에 따르면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바로 그 소망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지금 여기”에 속박된다는 사실이 예술을 통해 행복으로 나아갈 때 일어나는 치명적인 모순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주어진 삶에서 새로운 삶을, 즉 “삶에 맞서는 삶”을 제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여기에 있고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보다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는 일에 매진해야 하는 도구가 된다. (중략) 겉보기에 삶의 적으로 보이는 이 사람, 이 부정하는 자, 바로 그는 삶의 아주 커다란 보존하는 힘과 긍정하는 힘에 속하는 것이다.”7
예술이란 결국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소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는 여가활동이나 선행에서 성취되는 손쉬운 행복과는 구별된다. “삶에 맞서는 삶”이란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음으로써 이 세계에 속하려는, 삶을 부정함으로써 삶을 긍정하려는 열정과 실천을 뜻한다. 따라서 니체는 예술과 삶이 하나가 됐을 때 분열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이 분열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유와 결부된 예술적 삶’과 ‘필요성necessity과 결부된 강제노동의 삶’ 사이의 분열이다. 우리는 전자를 추구할수록 후자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고 자존감을 지닌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경제적 생존에 관해서는 곤란에 처할 것이다.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기 자신이 분열되기를 바라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을 향유하는, 그리고 더구나 그 자신의 전제 조건인 생리적 생활 능력이 줄어듦에 따라 점점 더 자신만만해하고 의기양양해하는 분열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8
셀 수 없는 의지와 약속들이 머물 공통의 장소를 찾아
이러한 논의는 앞서 공동체 논의와 어떻게 다른가? 내가 만난 다수의 (전부는 아니다) 예술가들은 -그들이 아마추어이건 프로이건, 혹은 공동체 사업에 참여하건 아니 건- 좋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선의나 정의감으로 계몽된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차라리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직업적 선택만으로 예술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술이 성공과 명예가 아니라 해방과 행복을 선사해주리라는 믿음을 따라 예술의 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들은 생계와 생활의 차원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가의 작업에도 공통의 의지와 소망이 담길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마치 먼 곳에서 보낸 친구의 편지처럼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는 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와 이미지가 담긴 공통의 장소를 보여준다. 때때로 그들은 공동체를 추구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공동체는 결사체나 조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만남과 대화와 작업이 이루어지는 실용적이고 호혜적인 공간에 가깝다. 그러한 공간은 마거릿 콘이 말한 ‘급진적 공간radical space’과 유사하다. 그 공간은 기존의 공동체를 덮거나 뒤집는 권력을 갖지 못하지만 그 공간을 마름질하는 평등한 교제의 원리는 “그보다 더 큰 사회를 조직하는 원리에 도전”하며 “상호작용을 미리 결정짓고 있는 상투적인 행위와 정체성을 일시적으로나마 유예시킴으로써 얼마든지 변혁적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9
요컨대 예술은 행복해지려는 의지와 소망의 표현 속에서 기존의 공동체 내에 다른 공동체를 기입시킨다. 이때 예술은 기존의 공동체를 단순히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로 나눈다. 이것은 세계의 분열인 동시에 자아의 분열이다. 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다른 공동체에 속한 자기 자신을 견딜 수 없게 하는 분열이다. 이것은 특이한 불륜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는 불륜에 빠진 두 남녀가 나온다. 사랑에 빠진 주인공은 자신의 삶이 “두 개의 삶”으로, 즉 남들의 것이랑 다를 바 없는 가짜 인생과 “밤 같은 비밀의 덮개 아래 흘러가는 진짜 인생”으로 나뉘는 것을 느낀다. 이 두 번째 삶 속에서 주인공은 속박과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해진다. 주인공은 두 번째 진짜 삶이야말로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안다. 두 번째 삶이야말로 “아직 멀고도 먼 길이 남아 있으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인생이라는 사실을.10 개인적 불륜 이야기와 달리 예술은 공통의 ‘딴살림’을 차리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흔하고 빤한 불륜 이야기와 달리 예술의 ‘딴살림’은 얄팍한 거짓말이나 요령 따위로 유지될 수 없다. 그것을 위해서는 물질적 자원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그토록 희미하고 희박한 장소와 관계를 건설하고 지속시키는 데에도 ‘무한’이 필요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부터 소환되는 이야기와 이미지와 선언과 약속들이, 그 모든 것들이 뒤섞인 마법이 필요하다.
심보선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과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사회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문예술잡지 F》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눈앞에 없는 사람』 (2011), 『슬픔이 없는 십오 초』 (2008)가 있다.
예술과 공동체, 분열 혹은 불륜?
분량6,564자 / 13분
발행일2014년 3월 31일
유형오피니언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모든 텍스트는 발췌, 인용, 참조, 링크 등 모든 방식으로 자유롭게 활용 및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원문의 출처 및 저자(필자) 정보는 반드시 밝혀 표기해야 합니다.
『건축신문』 웹사이트 공개된 이미지의 복제, 전송, 배포 등 모든 경우의 재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원 저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