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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속 건축가

김장언, 신보슬, 임근혜

최근 많은 미술관이 건축과 디자인 전시를 가진다. 관해서 강조하는 융복합의 유행과 어느 정도 맞물려 있기도 하지만, 최근의 지식생산 체계 변화와 삶의 조건들이 변화하는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요 미술관 큐레이터들과 건축 전시 성황의 이유와 앞으로의 전망을 이야기 나눴다.


김장언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기획 2팀장이며 미술이론과 문화이론을 전공했다. 큐레이토리얼 프로젝트로는 《소행성 G》(김소라 최춘웅 이주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주시, 2013), 《픽션워크-국립현대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 2012), 《박이소–개념의 여정 (공동큐레이팅, 아트선재센터, 2011), 《Mr. Kim 과 Mr. Lee의 모험》(연출 정서영, LIG 아트홀, 2010)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미술과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현실문화, 2012)가 있다.

신보슬  현재 토탈미술관 책임 큐레이터로,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다. 아트센터 나비, 서울시립미술관(미디어시티 서울2004 특별팀), 대안공간 루프 등에서 일했으며, 2007년부터 토탈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해외 기획자들과 《On Differens2》, 《Acts of Voicing》 등과 같은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는 전시를 공동으로 기획했으며, 2010년부터는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playground in island》, 2011년부터는 큐레이터와 작가가 함께 여행하며 전시하는 여행프로젝트인 <로드쇼>를 비롯한 새로운 다양한 국제프로젝트들을 기획하고 있다. 현재 안토니 문타다스의 새로운 프로젝트 《Asian Protocol》과 《로드쇼:북동부인도》를 준비 중에 있다.

임근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장으로 예술학, 큐레이터십, 박물관학을 전공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서울시립미술관과 경기도미술관을 거치면서 소위 ‘공무원 큐레이터’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첫 저서인 『창조의 제국-영국현대미술의 센세이』(지안북스, 2009) 출간 후 “1990년대 이후 한국 문화정책의 변화가 공공미술관 운영과 큐레이터십에 미친 영향”이라는 연구주제로 박사과정을 하기 위해 잠시 영국으로 떠났다가 2013년 말 다시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진행 박성태  본지 편집인


박성태 최근에 건축이나 디자인과 같은 활동들을 미술관이 수용하는 경향과 그 이유, 또 이를 어떻게 가져가는 것이 좋을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김장언 저는 개인적으로 건축과 디자인 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태도들이 전통적인 미술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봤을 때, 어떤 측면으로는 알프레드 바Alfred H. Barr가 만들어낸 근대적 미술관이란 개념이 더 이상 동력을 잃고,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편으로는 또 박물관이라는 것이 어떤 차원에서는 일종의 잡동사니의 집합으로 볼 수도 있잖아요. 우리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아카이빙이 매우 체계적으로 구축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출발점에서는 비선형적인 움직임 속에서 구축된 뒤죽박죽의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뮤지엄이라는 어원적 근원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죠. ‘경이의 방Wunderkammer’이 체계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건축이나 디자인이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것을 새로운 트렌드나 단순한 대중적 현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근대 이전의 상태들이 복권하는 과정으로 보고 싶습니다.

신보슬  토탈미술관이 건축과 가깝다보니 건축가 분들도 많이 다녀가고, 건축 관련 강좌도 정기적으로 있어요. 그리고 전시공간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항온항습에 취약한 편이어서 사진이나 회화 보다는 프로젝트성 전시나 설치가 더 잘 어울립니다. 그러다 보니 건축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도시로 이어지고, 관련 프로젝트도 하게 된 것 같아요. MVRDV의 《버티컬 빌리지》(2012)도 그렇고, 지금 전시 중인 《오, 마이 콤플렉스-도시를 바라볼 때 밀려드는 불안에 대하여》도 유사한 맥락에서 진행했던 전시이자 프로젝트였어요. 다만 그동안 건축과 연관된 프로젝트라고 하더라도 건축이나 건축가 자체에 방점을 찍기 보다는 그와 연관된 도시계획urban planning이나 도시적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MVRDV의 《버티컬 빌리지》도 건축가로서 그들의 성과에 주목하기 보다는 홍콩, 동경, 대만과 같은 아시아 도시의 특징에서 시작한 도시계획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과 리서치가 흥미로웠습니다. 돌아보면 상당히 실질적인 관심사와 필요, 상황에 의해서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아요. 미술관의 역할이 한마디로 정리될 수 없겠지만, 개인적으로 현대미술관의 경우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진다고 생각해요. 그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건축이나 디자인이 들어왔다고 봅니다.

임근혜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종합극장》(2013)이나 《북유럽 건축과 디자인》(2014)의 일부로 건축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건축만 다룬 적은 없어요. 이곳에서는 디렉터십directorship과 큐레이터들의 라인업에 따라 전시 성격이 많이 달라지는 편인데, 이번 큐레이터들은 최근 트렌드인 탈장르, 융복합에 잘 맞는 팀으로 구성되었어요. 그런 영향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에 대한 인식 자체가 이제는 특별한 장르나 매체에 국한되어있지 않잖아요. 시각적 언어로 새로운 lifestyle이라던지, 태도, 사고방식 등을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식으로 미술에 대한 접근 자체가 굉장히 확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의식이나 기대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해요. 그래서 서울시립미술관은 아예 장르적·공간적 특성화를 해서 남서울 분관에서는 디자인과 공예를, 북서울관은 사진과 커뮤니티아트를 중심으로 다루어요. 심지어 대중문화를 포괄하는 아이템도 구상 중입니다.

이런 현상은 미술에 대한 시각의 확장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다양한 업계들과의 상호생존전략과도 관계가 있지 않나요? 예를 들면, 타 장르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것을 보여주기 위해 대중적 프레젠테이션 공간인 미술관에서의 전시를 원하죠. 한편, 미술관도 주어진 예산 내에서 전시를 꾸리기보다는 외부 기업이나 기관과의 협업을 통해 규모나 영역을 넓히고 싶어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제휴하기도 해요.

미술관이 다양한 장르를 수용해야 하는 이유와 여건

박성태  큐레이터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이어가 보죠. 미술관에서 다루는 장르가 넓어지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시나요?

김장언  보통 미술이론을 공부할 때 근대 이후에 구축된 미학과 미술사학의 방법론 훈련을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시절 그게 적응이 잘 안 되더군요. 문화의 최고점으로서의 예술이라기보다, 문화의 한 형식으로서의 예술을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근대적 의미의 미술과 그 장르적 특성이 갖는 고유한 가치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 형식으로서 새로운 창조적 의미체계들이 어떻게 등장할 것인가에 늘 관심이 있어요. 자연스런 ‘경계 지워짐’이 저한테는 흥미로웠습니다.

한편으로 최근 새로운 움직임이나 몇몇 특정 경향, 좀 특이하거나 이상한 것을 또다시 다원이나 융복합이라는 이름으로 묶는 것은 특정-장르화 되는 것으로 너무 근대적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상황들, 생각들, 움직임들을 규정짓지 않으면서 작동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신보슬  미술관에서 다루는 장르가 넓어지는 것에 대한 동의라기보다는, ‘하다보니 넓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답인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안토니 문타다스Antoni Muntadas와 MIT 학생들과 했던 워크숍 <Seoul:Walks>을 비롯해,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다루었던 《Redesigning the East》, 《Acts of Voicing》과 지금 전시 중인 《오, 마이 콤플렉스》, 그리고 하반기에 있을 《Asian Protocal》까지 많은 것이 도시계획과 도시적 삶,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관심을 둔 프로젝트입니다. 주제가 이렇다 보니 다루는 장르가 다양해지고 넓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 같아요. 특별히 이런 과정들이 융복합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예를 들어 《Acts of Voicing》에서 보이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퍼포먼스, 다큐멘터리, 철학자와 미학자가 자연스럽게 들어와요. 《Asian Protocol》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한국, 중국, 일본에 대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하다 보니 한·중·일 건축에 대한 비교분석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고, 국제관계에 대한 내용들을 살펴보게 되는 것이지요. 건축 전공이 아니니까 전공한 분들을 찾게 되고, 다양한 전공자들이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어우러지게 됩니다. 처음부터 융복합이나 장르 간의 융합을 목적으로 했다기 보다는 주제에서 출발하다보니 다 만나게 되었어요.

이런 방식의 프로젝트가 가능한 것은 사립미술관(토탈미술관)이 가진 기획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외국 큐레이터와 협업으로 보통 3년 정도의 기획기간을 가지고 진행하는데, 제 경험으로는 일반 국공립 기관에서는 이렇게 진행하는 게 쉽지 않은 것으로 알아요.

임근혜  융복합이라는 것이 자연발생적이고 자발적인 흐름을 타야 하는데, 제도적 틀에 맞추려다 보니 억지스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지원이 필요한 작가 입장에서는 지원프로그램들이 융복합을 선호하니까 작품의 방향 자체를 바꾸기도 합니다. 문제는 지속성인데, 내적 필연성이 아니라 제도적 장치에 이끌려 방향을 바꾸다보면 탄력을 받는 강도가 다르거든요. 그런 점에서 제도가 이끌어가는 것, 즉 분류와 등급을 매기고 장르화 하는 것은 생명력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하는 것 같아요. 문화정책이 트렌드를 타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하죠.

신보슬  제도나 지원에 의존하게 되면, 어느 순간 우후죽순처럼 너도나도 융복합이라는 레이블을 달고 일어났다가 제도적 지원이 사라지면 관련 프로젝트들도 순식간에 없어집니다. 이런 현상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피할 수 없는 장르간 협업에 대한 자세와 대처

박성태  그러한 경향은 건축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어찌됐든 큐레이터 입장에서는 자신의 관점을 갖고 전시를 올리는 게 우선일 텐데요. 그럼에도 외부적 요인에 의해 다른 장르를 수용해서 전시를 꾸려야 한다면, ‘나는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겠다’ 하는 게 있나요?

김장언  다원이나 융복합 경향은 형태보다 방법론이 중시되면서 나온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보다 구체적으로는 미술 생산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가운데 협업의 가능성이 재발명되면서 부각된 것이죠. 이것은 비단 미술의 문제라기보다는 지식생산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 같아요. 새로운 지식의 생산이라는 것이 누구의 독립된 선구적 선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협업 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미술관이 (창조적) 지식생산의 장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방식은 유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더군다나 예술이 어떻게 삶의 조건을 성찰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그 삶을 담아내는 그릇인 건축과 디자인을 사유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건축은 동시대 건축가 중심으로 기획 중이고, 디자인은 미술과 디자인의 접점에서 나오는 논의들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실험미술과 퍼포먼스는 몇 년 전에 역사적인 관점에서 연구된 전시가 있었습니다. 모두 ‘보존’과 ‘연구’의 관점에서 시행된 프로젝트라고 봅니다.

신보슬  제 경우는 정말 운이 좋은 편인데요. 토탈미술관은 큐레이토리얼십에 대한 자율성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착한 내용의 전시를 만들기보다는 비판적인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서울시립미술관이 ‘착한 디자인’에 대한 전시를 기획한다면, 토탈미술관은 디자인에 좀 더 날이 선 시선을 견지했어요. (관객은 많지 않았지만) 《Redesigning the East》(2013)는 7명의 해외 큐레이터들과 약 3년 전부터 독일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이자 전시였는데, 프로덕션디자인 개념에서 벗어나 커뮤니케이션디자인을 좀 더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디자인이라는 개념 자체를 확장해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집중했어요. 작년에 한국에서 두 번째 에디션으로 전시를 했을 때는 한국이라는 상황에 좀 더 초점을 맞췄고요.

유사 건축 전시라고 해도, 미술관은 라이프스타일의 대안 제시나 건축사적 조망 보다는, 현재 우리의 상황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기를 권할 수 있는 관점에서 전시를 만들고자 해요. ‘지금 이런 상황인데, 이래도 괜찮겠어?’ 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또 다른 예로는 다니엘 가르시아 앙두하르Daniel Garcia Andujar의 《Postcapital Archive: 1989-2001》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저작권과 아카이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저작권의 무조건적 보호 보다는 지금의 저작권법을 다시 돌아보고자 카피레프트를 넘어서는 개념들을 제안했어요. 이런 프로젝트들은 완결된 작품을 초청하기 보다는 제안한 주제를 함께 발전시키는 과정으로 진행됩니다. 물론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이 의견차이도 있고 협의 과정에서 처음의 주제가 흐려질 때도 있지만, 토론과 협의 과정을 거치면 분명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요. 그래서 타장르와의 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근혜  여기서 기관의 태생적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네요. 관람객을 의식하지 않는다니 놀랍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미술관에서 이루어지는 타장르와의 협업에서 가장 중시하는 부분 중의 하나가 관람객이거든요. 사립미술관 관객층은 기존 미술장르에 국한하면 굉장히 폐쇄적이고 한정적이죠. 그런데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미술관에게는 기관 평가를 받을 때 가장 중요한 척도가 관람객 숫자거든요. 얼마나 많은 시민들에게 미술관 콘텐츠가 공유되고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타장르와의 협업 전시에서는 새로운 관객을 유도하는 게 중요해요. 사실 큐레이팅이란 것은 기존의 아이디어나 태도에 도전하고 물음표를 던진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공공미술관에서는 이 뿐 아니라 항상 전시에 대한 명분, 공공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관람객을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장언  관람객의 수도 중요하긴 합니다만, 공립이든 사립이든, ‘공공성’이라는 것을 ‘대중주의’와 지나치게 결합시키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 않나 합니다. 미술관이 예술창작의 급진적 담론을 생성하는 것도 일종의 공공성이며 이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논의의 장으로서 미술관은 대중적 친화성이 떨어진다는 데 있죠. 그 균형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공성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해요. 미술관은 고유하게 (창조적) 지식생산의 장이었지 단지 오락entertainment의 장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신보슬  물론 관람객 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요. 다만 덜 의식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사실 토탈미술관은 타깃 관객층이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대부분의 관객들은 미술계 관계자나 전공 학생들이 많은 편이예요. 최근 일반인도 늘긴 했지만, 대부분은 전시를 찾아 일부러 오기 보다는 북한산에 다녀오시다가 미술관이 있으니 들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미술계에서 토탈미술관 전시는 너무 리서치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읽을 것도 많아서 쉽지 않은 걸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미술계에서 쉽지 않다고 했던 전시들을 일반 관객은 편하고 더 재미있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제나 이미지도 거의 정확하게 읽어냅니다. 한번은 관객에게 물어보니, “어려운 전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라 그런지 ‘예술작품’을 보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부러 어려운 전시를 만들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다양한 미술관들이 자신의 색깔을 가지다 보면 좀 더 다양한 관객층을 흡수하고,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확실히 토탈미술관에서의 전시는 대림미술관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 혹은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미술관들이 각자의 색깔을 가진 전시를 하다보면, 관객의 선택 폭도 넓어지겠죠. 그 점에서는 사립미술관이 국공립미술관보다는 확실히 자유로운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담론과 일반 관객 사이의 미술관

박성태  미술관과 큐레이터의 미션 중 하나는 사회 문제 혹은 이야기에 매듭을 한 번 지어주는 거잖아요. 건축에서 예를 들어보면 MOMA의 《해체주의 건축》(1988)이나 《가벼운 구성Light Construction》(1995) 전시 등을 통해 새로운 건축언어를 전면에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변곡점 역할을 하는 거죠.

김장언  국공립미술관이 가진 기능 중에 ‘연구’가 있는데, 전시라는 형식으로 내용을 드러내고, 새로운 담론을 창출하는 것이 중요하죠. 국립현대미술관도 그러한 기능을 놓지 않기 위해서 굉장히 고심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위협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관람객을 신경 써야만 하는 상황이죠. 그래서 프로그램을 어떻게 다각화할 것인가는 미술관의 숙제입니다.

박성태  한 방향으로 치닫는 것이 항상 유의미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너무 심각하게 관리하고 연구해서 ‘이 작가가 최고야’ 하는 것과 즐길 거리가 있는 전시가 동시에 가는 거잖아요.

김장언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그런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 이것은 국립현대미술관뿐만 아니라, 서울시립미술관도 분관이 생기면서 야기된 현상인 것도 같고요. 또한 일반 대중의 여가 시간이 늘어나면서 대중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입체적으로 요구하고 있어요. 대중은 매우 전문적이기도 하고 매우 일반적이기도 합니다. 그 층위가 너무 넓어서 조절하기가 쉽지 않죠. 그래서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나 해요. 우리 사회에서 미술관 관람의 역사가 서구에 비해 매우 짧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지금 세상은 그런 것을 기다려줄 여유가 없지만요.

임근혜  그러한 현상 때문에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거죠. 아직도 미술관에 전시하는 작가나 관람객이 소위 ‘아트엘리트’라는 특정 층위를 중심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점차적으로 전시 관람객의 층위가 다양해지고 스펙트럼이 확장하고 있어요.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부응해서 제도적인 요구도 생기는 것이고요. 그런데 문제는 책임운영제, 기관평가와 같은 제도적 장치들이 기계적인 정량적 평가에 의해 이루어지다보니, 관람객의 다양성을 파악하고 질적인 요구를 반영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런 이유로 국공립 큐레이터는 끊임없이 제도적 요구와 큐레이터십의 지향점 사이에서 방황하고 좌충우돌 할 수밖에 없고요.

김장언  한 건축가가 말하길, “가장 훌륭한 건축가는 자기의 집을 스스로 짓는 ‘아무나’일 수 있다”했어요. 이건 매우 맞는 말입니다. 장르적 의미의 건축을 떠나서 자신을 머물게 할 공간을 스스로 구축하는 것은 매우 야심에 찬 일이죠. 그래서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와 몇몇 작가들이 작업으로서의 집을 노년에 기획하고 실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아무나’로서의 건축가는 위험한 것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예술가, 누구나 디자이너와 같은 이야기의 함정을 반복하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누구나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라는 말이 갖는 급진성보다는 예술가적인 디자이너적인 건축가적인 경험을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처럼 활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중주의적인 태도를 벗어나서 건축가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생각해 봐야 해요. 그것은 작가로서 건축가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저는 사유의 형식을 새롭게 구축하는 사람으로서 건축가는 누구인가로 다시 질문을 던져 보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새로운 지식 생산으로서의 좋은 건축 전시의 예

박성태  일반적으로 작가주의라고 하는 것이 현실과 이상의 빈틈을 메운다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쾌감을 준다거나 하는 등 여러 면에 개념이 있지만, 보통 건물을 일정한 기술을 사용해 쿨하게 만드는 정도로는 작가주의적 건축가라고 할 수 없다고 보는 거죠. 이것보다 더 나아가서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고, 그 지점을 향해서 몸부림치는 뭔가 있어야 하는데……

김장언  예를 들어, 건축이건 미술이건 그의 사유 방식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드러내거나, 우리에게 사유의 충격을 제공할 때 우리는 그를 ‘작가’라고 부릅니다.

최근 건축에서 인문학으로서 건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것 같아요. 저는 이러한 경향이 매우 모순이라 생각하는데, 건축은 언제나 인문학이었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질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한다면, 미술이나 건축이 비단 기능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것들은 삶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히려 ‘건축은 인문학이다’라는 선언보다, ‘지금 건축에서 시급한 질문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으로 변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건축만의 문제만은 아니겠지요. 미술계에서 신자유주의 조건에서 작가의 소외에 대한 논의가 한동안 활발히 있었는데, 건축계 역시 거기에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집을 짓기 쉬운 시대입니다. 누구나 지을 수 있죠. 그런데 한 편으로는 건축은 거대해지고 있습니다. 이 거대해진 건축적 도시적 프로젝트에서 건축가들은 점점 개입할 여지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저는 이런 현상 속에서 건축가 스스로 이야기하는 자신만의 건축적 행위에 대해 듣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임근혜  방금 김장언 팀장이 인문학적, 사유적 차원에서 건축의 작가주의적 측면을 언급했는데요, 좀 다른 맥락에서의 작가주의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굉장히 감동적으로 봤던 전시 중 하나가 2007년경 루이지애나미술관에서 열린 세실 발몬드Cecil Balmond의 전시였어요. 그는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의 <Angel of the North>나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런던 올림픽공원에 있는 <Arcelor Mittal Orbit> 등 초대형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엔지니어 건축가잖아요. 그분을 보면 인문학적 사유도 물론 있으시겠지만, 굉장히 기능적이고 수학적 과학적 원리에 기초해서 조형적 가능성을 확장시킨 기술력이 매우 아름다운 것이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런 점에 있어서 건축이나 공학이라는 장르적 기본에 충실한 것도 하나의 작가정신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김장언  저는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에서 열린 《Cold War Modern: Design, 1945-1970》(2008) 전시가 기억에 남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 디자인, 건축, 예술이 냉전체제와 더불어 어떤 삶의 상태를 구성해 왔는지에 대해서 살펴본 전시였어요. 인상적이었던 것은 작가라는 인물 중심이 아닌 문화적 형태로써 창조적 움직임들이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어떻게 조응했는지를 전면적으로 살펴본 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시가 공예디자인 박물관인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에서 기획되었다는 것은 상징적이었습니다. 공예와 디자인을 단순한 장르적 차원에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저로서 그 맥락과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보슬   MVRDV의 《Vertical Village》도 건축가들이 어떤 건축을 해 왔다는 것을 나열해서 보여주는 ‘실적의 전시’라기 보다는 그들이 보는 사회가 어떻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된 전시였습니다. MVRDVD의 건축물을 보려고 오신 분들은 많이 실망했어요. 오히려 일반 관객들은 미술관 데크에 있던 설치물은 조각 작품도 아니고, 아파트라고 하는데 실제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인가 궁금해 하기도 하고, 대만과 홍콩, 서울의 도시 모습을 나름대로 비교하고 분석하기도 하면서 전시를 관람했습니다. 도시 특히 아파트에서의 삶이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며 흥미로워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MVRDV의 전시에서 건축가다 아니다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장언  저는 직접 볼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러한 의미심장한 전시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디펜던트 그룹The Independent Group의 《Parallel of Life and Art》와 폴 브릴리오Paul Virilio와 그의 동료가 만든 《Bunker Archeologie》는 아마도 대표적일 것 같습니다. 그것은 건축전시라기 보다는 새로운 창조적 지식생산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아마도 쇼룸이라기보다는 창조적 지식생산의 장으로서 전시일지도 모릅니다.

신보슬  그렇게 본다면, 사고의 변환을 실험하기 가장 좋은 데가 전시장이란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건축분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런 점이고요. 제가 볼 때는 그냥 일반 건축전시들 하고 큐레이터들과 같이 하는 전시의 차이는 거기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건축적 성과를 보여주고, ‘우리는 이런 것을 했습니다’ 식의 나열이나, 모형과 도면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세상을 읽었는지, 그리고 실험했는지 하는 부분들에 더 관심이 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김장언  그렇죠. 좀 더 고급스럽고 세련된 하우징 페어를 미술관에서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건축적 사유들이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들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있는가를 탐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전시를 본 적이 있었는데, 물론 거기에도 모형이 있었지만, 그 전시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의 건축세계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의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세계를 향해서 그가 던졌던 비전이 구축되는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축이 흥미로운 것은 어쩌면 삶에 대한 비전이 매우 물질적으로 공간적으로 구축된다는 점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전시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흥미롭지만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임근혜  솔직히 전시장에 들어서면 디스플레이를 통해 예산, 준비 시간, 제도적 한계가 고스란히 보이잖아요. 어설픈 협업에서 나오는 촌스러움, 애매모호함, 이런 것들은 노력해서 완성도를 높이거나 할 수는 있지만, 그게 현실 자체에요.

김장언  건축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최근 건축의 논의는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대중들의 건축에 대한 관심에 비해서 건축계는 대중의 사유를 이끌고 가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땅콩 주택은 한 예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근대적 삶과 거주공간이라는 층위에서 비판적 논의를 확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량한옥-문화주택- 공동주택-땅콩주택으로 이어지는 중산층 거주 공간의 흐름에서 건축의 비판적 언어를 듣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매번 경제적 효율성과 삶의 쾌적성으로만 이야기되는 것 같아요. 제게 땅콩주택은 한편으로 영국식 이호 연립주택semi- detached house에 대한 퇴행적 버전으로 읽혀지기도 합니다.

박성태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 건축계가 80년대 이후에 새로운 어젠다를 내놓지 못하고 있어요. 건축이 단순히 사회적으로 집과 사무실이라는 형태로 소비되는 위험에 처했어요. 건축가들이 뭔가 방점을 찍을 수 있는 게 없어진다고 하면, 심각한 거죠. 사회적 관심이 건축가들에게 유의미한 자극이 되길 바라죠.

김장언  그런 지점에서 저는 급진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건축을 지워보면 어떨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회화, 조각과 같은 장르적인 차원에서의 연구와 보존을 위해서 건축이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동시대성에 대한 탐구로서 건축적 사유를 살펴보기 위해서 건축을 지워보는 행위도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신보슬  개인적으로는 건축에 방점을 찍는 전시들 중에서 강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MVRDV의 전시제안을 받았을 때도 그들이 건축가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도시와 공간 그리고 삶의 방식에 대해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점이 좋았습니다.

임근혜  이 부분에서 우리가 맨 처음에 했던 ‘왜 장르간의 협업이 이루어지는가’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겠어요. 197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뮤지엄의 중심적 기능이 오브제의 진열과 설명에서 지식의 생성shaping of the knowledge으로 전환되면서 포스트-뮤지엄post- museum이라는 개념이 주창되었는데, 그 의미는 미술관이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의 참여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것이지요. 즉, 관람객의 참여와 장르간의 협업이 중요해진 현상은 미술관 업계에서는 이미 70년대부터 있던 거거든요. 이런 내용이 지금도 계속 논의되고 있다는 것은 장르적인 이야기보다 함께 지식을 생성해 나간다는 부분이 중요한 것 같아요.

새로운 미술관과 큐레이터의 모습

박성태  테이트모던미술관도 단순히 미술만 담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던졌잖아요. 21세기의 새로운 미술관은 과연 무엇인가? 하면서. 광고 홍보물 보면, 그 안에 다양한 활동들이 담기는 미술관을 지향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미술관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장언  그러한 새로운 움직임만이 미술관의 기능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움직임들이 발생되는 이유는 창조적 지식생산의 모델들이 달라지고 있고, 더 이상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새로운 창조적 지식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고에서 출발합니다. 예술을 창조적 지식생산의 중요한 장으로 고려한다면, 그 생산이 작동될 공간에 대해서 새로운 형식을 고민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퍼포먼스가 뜨니까 공연장을 미술관에 만들자’와 같은 사고방식이 아니라 변화되는 창조적 지식생산의 형식들을 미술관이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실험들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박성태  큐레이터는 비교적 독립적인 직업이잖아요. 현직은 주요 미술관 소속이지만요.

김장언  저는 독립큐레이터에 익숙한 편입니다. 솔직히 얘기하면 저는 한 번도 직업으로서 큐레이터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직업명으로 큐레이터는 흥미롭지 않았고, 어쩌면 지식 생산자의 새로운 모델로서 큐레이터라는 것에 흥미 있었던 것 같아요. 운이 좋게도 여러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미술과 문화라는 것 주변에서 그러한 움직임들을 만들고 실행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기관에 속해있지만, 현재 이러한 위치는 제게 또 다른 도전입니다.

임근혜  제가 얼마 전에 우연히 대선배님 한분을 만났는데, “미술관 큐레이터나 디렉터는 장기판 위의 바둑알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말이 정말 공감이 가더라고요. 관료적 시스템 안에서 창조적 작업을 해야 하는 이질적 존재들이니까요. 이 말을 좀 더 발전시키면 기관형 큐레이터는 새로운 게임의 룰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건축이라는 장르가 유입되면서도 미술 작품을 디스플레이하는 것과 또 다른 어떤 조건들이 필요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판을 짜거나 새로운 룰이 만들어져야 하겠죠. 미술관 큐레이터에게는 창조적 작업을 실현시키기 위한 행정적인 절차들을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신보슬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미술선생님의 영향으로 큐레이터가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그 후로 다른 직업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어떤 직업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저 예술작품을 통해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운이 좋게 큐레이터가 되었고 아트센터 나비, 대안공간 루프, 그리고 서울시립미술관(미디어시티 서울 2004 특별팀) 등을 경험하고 지금 토탈미술관이라는 사립미술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기업형 사립미술관, 대안공간, 공립미술관 등 다양한 기관에서 일을 해봤습니다. 물론 독립기획자로도 짧게 일한 적이 있고요. 저는 독립기획자보다는 확실히 기관에 있는in-house 큐레이터가 좀 더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조직(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 조직이 발목을 잡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요.)

요즘 독립으로 일하는 신진큐레이터들을 보면 크던 작던 자신의 기획 프로젝트를 만들기보다는 좋은 스펙으로 이력서 쓰는 일에만 급급한 것 같아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현실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작은 전시라도 스스로 해 보는 것이 기획자로서는 큰 자산인데, 처음부터 큰 시스템에 들어가 일하다보면 자신이 기획자인지 행정보조인지 모른 채 나이만 들고, 그러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경우들도 종종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임근혜  제 경우는 큐레이터 생활 대부분을 공공미술관에서 해왔는데, 공무원이 만들어놓은 제도적 틀 안에서 큐레이터십을 발휘하기 위해 늘 투쟁했던 것 같아요. 제도적 관성을 극복한다는 게 쉽지는 않은데, 조금씩 꾸준히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예를 들면, 정량적 평가에 치중한 성과지표를 정성적 평가로 개선한다던지, 그런 게 큐레이팅이나 프로젝트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거든요. 그런 게 개선되면서 큐레이터들이 좀 더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는 것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 의욕이 생기죠.

김장언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큐레이터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간에 늘 판을 새롭게 만드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 판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전시 문법, 즉 창조적 지식생산으로서 전시가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카스퍼 쾨니히Kasper König는 현재 살아있는 큐레이터 중에서 상징적인 것 같습니다. 기관과 독립 사이에서 여전히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판을 갈아 업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면, 오래전에 보았던 만화를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파블로 헬구에라Pablo Helguera의 <아툰스Artoons>(2009) 중 하나인데, 명제가 ‘자살의 유형Types of Suicide’입니다. 그는 세 가지 타입을 제시했는데, 그중 마지막이 ‘독립큐레이터가 되기Becoming an Independent Curator’입니다. 대학원을 막 졸업한 듯한 똘똘한 남성이 그려진 그 만화를 보면서 웃었죠.

박성태  함께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살의 유형Types of Suicide” 중 ‘독립큐레이터 되기Becoming an Independent Curator’, 블로 헬구에라Pablo Helguera의 <아툰스Artoons> 중 부분, 2009 / Ⓒ Pablo Helguera

미술관 속 건축가

분량16,799자 / 30분 / 도판 1장

발행일2014년 6월 30일

유형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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