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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의 끝이다

김경묵

편의점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양태나 전반적인 추이를 보여주는 ‘소우주’다. 25,000여 개가 성업 중이며 인구 2,000명 당 한 개 꼴이다. 당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작은 점포 역할에서 금융, 치안 등 공적 영역으로 영토 확장 중이다. 또한 일상의 중심이자 사회 부조리함의 단면이기도 하다. 최근 『편의점 사회학』을 출간한 사회학자 전상인을 인터뷰하고, 편의점이 주 무대인 김경묵 감독의 신작 영화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를 소개한다. 한국 사회에서 편의점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편의점은 도시를 깨어 있게 한다. 편의점은 언제부턴가 우리의 우체국, 은행, 식당, 세탁소, 문구점, 약국, 그 모든 것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24시간, 365일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이룬 체제이고, 이는 편의점을 통해서 구현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선언하는 듯한 이 공간에서 도리어 우리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편의점 25,000여 개의 시대, 우리는 매일 수십 차례 마주하는 그 공간을 통해 소비를 매개하지 않고는 만날 수 없거나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을 하며 생을 소모한다. 피로는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가 된 지 오래이다. 살기 위해서는 들이마셔야 하고, 이제는 몸의 일부가 되어 새삼스럽게 인식되지도 않는다. 그렇게 사람들은 편의점의 꺼지지 않는 불빛 아래에서 닳아간다.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는 너무 밝은 그 불빛 아래에서 점점 창백해져 가는 인간들에 대한 미시적 관찰기이다. 영화는 편의점에서 시작하여 끝을 맺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12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다룬다. 우리의 관찰 대상은 대학생, 자퇴생, 인디뮤지션, 취업준비자, 레즈비언, 탈북자, 중년실직자 등의 아르바이트생들과 이들의 고용주인 사장, 그리고 유령처럼 편의점을 오가는 손님들이다. 이 인물들을 통해 난 신자유주의가 완전히 일상 속으로 유입된 시대에 편의점이 갖는 공간적 의미와 편의점을 찾는 이들의 현실과 환상, 노동과 피로, 사랑과 이별, 개인과 사회의 관계성을 탐구하고자 한다. 각각의 아르바이트생들이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듯이 이들 모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얼굴로 드러난다.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작은 조각들을 모아 맞춰가다 보면 드러나는 퍼즐과 같이 이들은 시대의 조각난 얼굴들인 것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영화는 옴니버스 식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빗겨나 있는 듯 보이다가도 상호 침투하여 마치 여러 명의 다른 인간이자 한 사람이기도 한, 또는 하나의 이야기로부터 파생된 여러 갈래의 길과 같은 형태로 그려진다. 단일한 편의점 공간을 가로지르는 시간은 매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벽시계로 가시화되어 나타난다. 시계는 근대화의 산물로 이전의 다양한 시간 개념을 범세계적으로 동질화시킨 장치이다. 시계의 분절된 시간은 개인의 내적 시간 역시 동질화시켰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계의 강조는 아트바이트생이 입는 규격화된 유니폼과 같이 그리고 선분적 시간성 위에서 노동자를 감시·관리하는 자본주의의 표상으로 은유된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서 그들의 삶이란 시계의 톱니바퀴를 굴리는 톱니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영화는 편의점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의 시공간 체계를 영화적 형식으로 번안해 그들과 같은 지루함을 느끼고, 피로에 빠져들며 또한 일탈의 쾌감을 체험하도록 그 길을 명확히 설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편의점 생태계를 이루는 개체들은 대개 사회적 하층민들이지만, 난 연민에 빠져 이들을 통해 감동을 선사할 생각은 없다. 영화 속 이야기들은 우울하다기 보다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사건 속에 엉뚱한 웃음이 유발되는 블랙코미디의 톤이다. 각 에피소드마다 로맨스, 사회 드라마, 미스터리, 패러디 등의 장르 코드를 사용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냉소적이며 음울하고 때로는 공포스러운 유머 감각에 기초하고 있다. 밝고 쾌활한 웃음보다는 씁쓸한 웃음을 통해 관객이 이 시대 인간의 모순성과 부조리함을 발견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김경묵

2003년부터 영화제 기획 및 «한겨레21» 등 다양한 매체에 겸이란 필명으로 글을 기고하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였다. 2006년부터 2년간 동안 계간 «독립영화»의 편집위원을 지냈다. 2004년 영화를 시작해 그 해 실험다큐멘터리 <나와 인형놀이>, 2005년 첫 실험 극장편 <얼굴없는 것들>, 2008년 두 번째 극장편 <청계천의 개>를 제작했고, 그 외 다수의 미디어 작업을 병행해왔다. 이들 작품은 밴쿠버, 로테르담, 부에노스아이레스, 전주국제영화제 등의 유수영화제와 뉴욕MOMA미술관, 아르코미술관, 일민미술관, 대안공간루프, 남아메리카갤러리투어전 등의 갤러리에서 상영 및 전시되었고, 뉴미디어페스티발에서 최고작품상,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집행위원상 등을 수상했다. 세 번째 독립장편영화 <줄탁동시>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월드프리미어 이후 런던국제영화제, 홍콩국제영화제 등에 초청 상영되었고, 토론토 릴 아시안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2012년 3월 <줄탁동시> 국내개봉 이후 한국(상상마당), 대만(타이페이 영화제), 프랑스(한불영화제), 스위스(제네바 블랙무비 영화제) 등에서 전작상영특별전 및 회고전을 가졌다.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

분량2,556자 / 5분 / 도판 4장

발행일2014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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