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대화에 귀 기울이다
심보선 × 이경희
분량8,086자 / 17분 / 도판 1장
발행일2014년 6월 30일
유형인터뷰
심보선 시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이야기가 청중을 향한 것인지, 그냥 혼잣말인지 구분이 어려워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최근 ‘대화’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절, 단어, 문장, 문단 사이에 짧지 않은 침묵과 골똘한 눈이 하는 이야기는 막스 피카르트의 “말은 침묵으로부터 그리고 침묵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와 ‘대화’에 관해 좀 더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1
심보선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과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사회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4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 「풍경」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문예술잡지 F』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눈앞에 없는 사람』(2011), 『슬픔이 없는 십오 초』(2008)가 있다.
인터뷰어 이경희 본지 편집인
이경희 대화가 가장 고플 때는 언제이신가요?
심보선 대화는 기본적으로 면대 면으로 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대화는 눈짓, 손짓, 언어 등 주고받는 시그널이 많으니 더욱 즐겁고 이야기의 두께도 두터워져 풍부하고요. 그런데 한편으로 사람들은 혼자서도 대화를 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요즘 저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데, 때로는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만들어낸 상대와 대화를 해요. 미쳐가나 보다 하겠지만 (웃음), 사실은 그게 사유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적인 대화 없이는 사유라는 게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미 내 안에 나눔과 대화가 있고, 그 나눔이 타인으로 확장되는 것이 우정이라고 하거든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도 ‘고독’과 ‘외로움’을 분리시켜요. 외로움은 내 안에 나눔과 대화가 없는 ‘고립’이고 사적인 상태예요. 하지만 고독은 겉으로는 혼자 있으니 외로워 보이지만, 내 안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에요. 그 내면의 대화는 사유로 이어지는 동시에 공적이어서 공동체적이라는 거죠. 그러면서 고립과 외로움이야말로 전체주의의 토양이라고 봅니다.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에게 부여된 명령에 자신을 던지는 거죠. 하지만 사유하는 사람, 즉 고독한 사람은 이미 자기 안에 공적인 토대가 있기 때문에 바깥의 권위와 권력이 부여하려는 획일화된 이념과 명령에 묻어갈 필요가 없다고 해요.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고 고립되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경희 면대 면 대화가 주는 시그널을 포착하는 묘미가 고독의 상태에서는 어떻게 경험되는지요.
심보선 글을 쓸 때 한 문장을 쓰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거리를 두고 문장을 내용과 형식 모든 측면에서 살피거든요. ‘내가 아닌 어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거죠. (김한민 씨와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내가 작업을 할 때, 내 어깨 위의 누군가가 같이 보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구인지가 매우 중요해요. 예를 들어, 이 ‘누군가’라는 독자는 대중이기도 혹은 비평가이기도 해서 ‘대중이라면 이 정도는 이해 못할 거야, 비평가라면 진부하다 하겠지’ 라며 자체 검열을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어깨 너머의 ‘누군가’는 이게 윤리적이냐, 정치적이냐, 책임질 수 있느냐, 평소 말하던 것과는 반대가 아니냐, 등 다른 차원으로 계속 물어보거든요. 그래서 그 ‘누군가’가 중요해요. 왜냐하면 그와 같이 쓰니까.
이경희 그렇다면 선생님의 어깨 위에 있는 누군가를 비롯해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보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미하엘 바흐친Mikhail Bakhtin의 글을 인용해 볼게요.
“인간은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법이 전혀 없다. 인간에게 ‘A는 A이다’ 라는 등식은 적용될 수 없다. (중략) 개성의 참된 생명은 대화적으로 침투 당할 때에서의 접근이 가능할 뿐이다. 그때 이 생명은 그 보답으로 자유롭게 스스로 밝히게 된다.”2
이건 본성 혹은 개성이라고 하는 내면 혹은 자아에 대한 보통의 상식과 다른 점이 있는 겁니다. 내가 내 한계 안에 갇히지 않는 거예요. 바흐친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미결정성”, 즉 예측할 수 없음, 완결되지 않음이라고 봤어요. 이 ‘최종화 될 수 없음’이 참된 생명인데, 대화적 침투, 달리 말해 누가 나에게 말을 건넬 때만 그 보답으로 자기를 드러낸다는 거죠.
이경희 저는 대화의 본령이 내 편을 확인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보선 고립되고 외로울 때 그 상태를 보듬어주는 게 대화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달라는 것, 그건 오히려 대화의 반대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답변이 ‘그래 맞어’ 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죠.
사실 재미있는 대화는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에 의하면, “네 말이 이런 뜻이니?” 라며 되묻는 것이라고 해요. 영어로 “In other words”, 우리말로 “달리 말하면, 이런 의미니?” 라고 되물어 다음 이야기를 유도하는 것이죠. “내 생각은 이랬는데, 달리 말하면 A는 A’가 되겠구나” 식으로요. 이것은 ‘너가 맞아’ 혹은 ‘너는 틀려’와는 분명 달라요. 그래서 동의나 동감은 일시적으로 고립되고 외로운 사람들의 심리를 다독여줄 수는 있지만, 자기만의 회로에 갇혀서 나올 수 없게 돼요.
이경희 시대에 따른 미디어 환경의 변화도 대화의 방식이나 목적에 영향을 주었을까요?
심보선 이것은 시대가 바뀌었다, 식의 거시적 차원의 변화만은 아닌 것 같고요. 매우 개인적인 변화이기도 하고 미디어의 변화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소셜미디어만 봐도 트위터의 ‘리트윗’이나 페이스북의 ‘좋아요’ 장치로 리액션도 간편하게 할 수 있잖아요. 또 너무들 바빠요. 실제 일의 강도나 노동시간이 어마어마해요. 그러면 미취업한 이들은 안 바쁜가요? 아니에요. 그들도 당장의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는 시간엔 취업 준비를 해요. 사실 수다를 떨 장소와 시간이 (온라인 이외에는) 부족하니 서로를 자극하기가 어려워요. 대화를 나눌 공간은 중요하거든요.
이경희 김수환 교수는 우리가 말하기를 강요받고 훈련받는 ‘말의 인플레이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3 개인적으로도 주변에 말은 많아지는데 소통 능력은 갈수록 서툴러지고, 혼자 있는 동안 생각하는 능력은 거세당했다는 생각이 심심찮게 듭니다. 이것은 앞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미디어 환경도 원인일 수 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사회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기검열도 더 커지기 때문은 아닐까요?
심보선 맞아요, 김수환 씨가 “면접의 말”이라는 표현을 썼죠. 미디어, 일의 지배에 더한 또 하나의 상황이 내가 인정받느냐, 통과하느냐 하는 식의 면접인 거죠. 제가 지금까지 말한 ‘인정recognition(알아봐주는 것)’을 ‘승인approval’이라고 바꾸어 말할게요. 리트윗, 상, 점수 등이 이에 해당해요. 김수환 씨가 말한 면접 식 대화는 ‘승인’이거든요. 매 순간 매 단계에서 모든 대화는 일종의 테스트예요.
이경희 침묵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대화는 침묵을 통해 사색의 그릇을 넓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좋은 대화를 위해 침묵도 더 잘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심보선 면대 면 대화에선 상대에게 ‘어떻게 생각해?’라고 질문했을 때 답이 바로 나오면 신뢰할 수 없어요. 하지만 상대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몇 초의 침묵을 가지다가 답을 하면 ‘내 말을 안에서 고민하는구나’ 싶어 왠지 신뢰할 수 있어요. 그래서 대화 안에서도 침묵은 중요해요. 물론 길어지면 어색하지만, 어떻게 극복하느냐도 중요하죠. 침묵도 긴장된 것과 이완된 것에 따라 다르고요. 대화의 반대는 침묵이 아니라 (아렌트 식으로 얘기하면) 고립이나 외로움이겠죠.
제가 어떤 땐 말이 많은데 또 어떤 땐 아예 말을 안 해서 상대가 오해를 하기도 해요. 침묵 중에도 뇌가 활동을 하니 스스로는 침묵했다고 의식하지 못해요. 그걸 보면 저는 침묵을 즐기는 것 같아요. 단, 그 침묵은 ‘대화 상태의 침묵’일 겁니다.
이경희 지난 강연에서, “대화는 상대를 배려하고 끊임없이 조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리 노력해도 어려운 이들도 있습니다.
심보선 제가 요즘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는데, 여기서 지하생활자는 끊임없이 대화하지만 매우 적대적이고 자기만의 생각의 회로와 행동의 알고리즘에 갇혀 있어요. 이러한 사람은 대화의 재미나 맛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저도 20대 후반이 지나서야 재미를 느낀 것 같아요. 하지만 결국 내가 즐겁게 대화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학력과 직업을 갖고 있어서 경계심이 있어요. ‘우리만 재미있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전혀 다른 배경과 성향을 가진 이들과의 대화는 물론 재미없고 대부분이 부딪쳐 적이 되기 쉽죠. 하지만 그 세계가 연결되는 유일한 방법도 대화거든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왜 내가 그들과 대화해야 하느냐’ 할 수 있어요. 저도 명백히 대화하기 싫은 집단이 있는데, 그건 대화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진영이 달라도 분명 대화가 가능하고 필요한 때가 있어요. 강연에서 예를 든 (이탈리아의 파업 노동자들을 진압하러 온 군인들이 카페에서 대화를 나눈 후 진압을 멈춘) 일화만 보아도 그렇잖아요. 듣는 편과 말하는 편 모두에서 최선을 다해 귀 기울이고 최선을 다해 말을 해야 한다는 거죠. 타협이나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 해도요. 이런 대화는 양편에 뭔가를 남기고 그것이 가능성을 열게 됩니다. 물론 적대와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대화가 세상살이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그러나 대화는 분명 변화가 일어나는 가장 미시적인 출발점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경희 신형철 비평가는 인류의 소통방식을 두고 “얼굴에서 음성으로, 음성에서 글자로, 우리는 축소돼 왔다. 이것은 진화일까?”라고 했습니다.4 대화의 모습과 기술은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요?
심보선 이 이야기의 논지는 소통이 진화하지 않고 축소된다는 거죠? 그런데 거꾸로 그 얼굴이 맨얼굴이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얼굴보다 음성이 나중에 왔는가 하면 그것도 그렇지 않고요. 힌두교 신화에서는 소리(옴唵)가 중요하다고 해요. 그건 시그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우주거든요. 글자도 자체로 독립 미디어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문자calligraphy는 원래 이미지와 텍스트가 뒤섞여 있었죠. 정리하면, 단선적인 대체로서의 축소라기보다는 과거의 다차원(얼굴, 음성, 문자) 상태가 점점 축소되는 방향으로 단순화된 겁니다.
근데 문학은 글자잖아요. 문학이야말로 문자를 기호화하는 방향에 적응하면서도 다차원성의 풍부함을 유지하고 있거든요. 기표와 기의의 단순한 대응관계로 축소되는 것에 저항하는 게 문학이잖아요.
그래서 이건 진화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반복되는 싸움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든 것이 질서와 쓸모로 환원되는 힘이 있고 (이건 얼굴, 문자, 인터넷이 똑같아요), 여기서 벗어나려는 놀이, 즐거움, 무질서의 힘이 있는 거죠. 인간이 살아있는 이상 이 둘 사이의 싸움은 계속될 겁니다. 이걸 피터 브뤼겔의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1559)을 보며 깨달았어요. 사육제는 질서, 신의 섭리, 교회가 지배하는 시기인 사순절 전에 좀 놀도록 풀어주는 기간이거든요. 이 그림에는 광장을 중심으로 오른쪽의 교회 앞 사순제와 왼쪽의 여관 앞 사육제가 묘사되어 있어요. 그런데 실제 두 사건은 시기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데 여기선 겹쳐 있고 제목에서도 투쟁이라고 하죠. 앞에서 살펴본 바흐친의 글에서도, 사육제가 끝났는데 계속 더 놀고 싶어서 둘 사이에 투쟁이 생긴다고 합니다.
“중세인은 마치 두 가지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공포, 교조주의, 공경, 경건함으로 가득 찬 엄격한 위계질서에 예속된, 천편일률적으로 진지하고 공식적인 찌푸린 삶이고, 다른 하나는 상호모순적인 이중적 웃음, 성물 모독, 성스러운 모든 것의 속악화, 비속화, 모든 사람과 모든 것과의 친밀한 접촉으로 가득 찬 자유분방하고 카니발 광장식 삶이었다. (중략) 모든 유럽 민족이 사용하는 격의 없는 말, 특히 욕지거리와 비아냥거리는 말은 오늘날까지 카니발의 잔재들로 가득 차 있다.”5

실제 우리가 비아냥거리는 말과 행동들은 오랜 전통을 지녔는데, 17세기부터 퇴조해 세분화·간소화되다가 “궁정축제의 가장무도회 문화”가 발전하면서 “축제유흥 계통”의 하나가 됐어요. 요즘의 축제들도 엄밀히는 국가와 자본이 후원하잖아요. 지금에도 반복되는 거예요. 제가 대화-놀이-예술을 연결시키려는 고민도 짐멜6이나 호이징가(‘호모 루덴스’)가 놀이에 집중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어요. 여기엔 단순히 변화만 있는 게 아니라 투쟁이 깔려 있는 거예요. 미디어 장이나 삶의 방식이 변화하는 가운데 사육제과 사순절이 계속 싸우는 거죠.
사람이 살면서 고통과 비극을 겪는 동안에는 절대로 놀이가 나올 수 없겠죠. 가령 홀로코스트 안에서 어떤 대화가 가능하겠어요? 하지만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는 아우슈비츠에서 이탈리아인 레비와 프랑스 청년 피콜로가 나누는 놀라운 대화가 있습니다.
“나는 서두른다. 미친 듯이 서두른다… 이거야, 잘 들어봐, 피콜로. 귀와 머리를 열어야 해. 날 위해 이해해줘야 해.
그대들이 타고난 본성을 가늠하시오. /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德과 지知를 따르기 위함이라오.
마치 나 역시 생전 처음으로 이 구절을 들은 것 같았다. 날카로운 트럼펫 소리,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잠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 잊을 수 있었다. 피콜로가 다시 들려달라고 간청한다. 피콜로는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그는 지금 이렇게 하는 게 나를 위한 일임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잘것없는 번역과 진부하고 성급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가 메시지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고된 노동을 하는 인간, 특히 수용소의 우리들과, 죽통을 걸 장대를 어깨에 지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두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느꼈을지 모른다.”7
여기서 레비는 단테의 『신곡』을 이탈리아어로 인용하는데, 이 프랑스 청년은 잘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귀를 기울이며 다시 들려달라고 하죠. 이처럼 아우슈비츠라는 극단적인 환경에서 문학을 매개로 언어가 다른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이 대화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또한 레비는 왜 이 대화를 잊지 못할까요. 말하자면, 가장 끔찍한 상황에서 즐거운 대화, 놀이, 문학이 움직였단 말이죠. 이것도 일종의 투쟁이겠죠.
이경희 대화가 투쟁으로 이어진다는 말씀에 더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심보선 저도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어요. 자기의 고된 삶을 버티기 위해 숨통을 열어주는 영역이 필요하거든요. 대화는 버티게 하기 위한 힘이냐, 아니면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이냐,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죠. 또 다른 질문은 (지극히 사회학적인 질문인데) 가장 미시적인 상호작용인 대화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 데 기여하는가, 하는 거예요. 대부분의 미시적인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사회학 이론들은 매우 보수적이거든요.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보고, 매우 반복적이고 의례적인 것을 강조해요. 또 한편으로 즐겁고 편하고 해방된 느낌의 대화에서 세상을 바꾸는 힘 중 하나는 아까 사육제와 사순절의 투쟁에서 사육제가 승리하는 거겠죠. 그런데 자유롭게 놀고먹는 세상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나 비전이 나올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노는 건 좋지만 놀이 속에서 다르게 살고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나올까, 그것은 대화에 내재할까, 대화와 별도의 것인가, 등으로 저도 계속 질문 중입니다.
이경희 독존주의를 깨는 힘으로의 대화도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대화의 힘을 탐구하는 과정이신 거네요.
심보선 내가 ‘대화’에 대해 어디까지 기대를 할 수 있을까 싶어요. 일단 저에게 대화는 무기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개인적인 심리 차원에서는 독존주의에 저항하는 것이고, 시스템의 차원에선 자본과 권력에 저항합니다. 대화는 인간성을 만들어가는, 그리고 공통의 삶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가장 미시적인 싸움이에요. 독존주의와 시스템은 인간성을 축소시키고 도구화시키는 힘이고, 대화는 그 힘에 맞서며 다른 삶을 만들어가는 힘인 것이죠. 바로 여기까지가 제가 최근에 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다른 결론입니다. 하지만 대화에 대해 알려면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고, 물론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합니다.
침묵의 대화에 귀 기울이다
분량8,086자 / 17분 / 도판 1장
발행일2014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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