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건축가, 소리 없는 운동가
정다영
분량3,781자 / 8분 / 도판 3장
발행일2014년 6월 30일
유형오피니언
표현 도구에 지나지 않는 ‘젊음’
건축가 앞에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전문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1 하지만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는 백년을 지속하는, 혹은 천년을 넘어서는 위대한 건축물에 대체로 가려져 있다. 이는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건축가들의 말과 그것이 기록된 사료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비로소 전 세대의 건축가를 갖게 되었다”는 전봉희 교수의 말처럼, 이제 “우리의 건축계는 학생부터 은퇴 세대까지 전 세대가 현 체제 속에서 경험과 인식을 공유하는 긴 당대”2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 있는 시점에서 우리 건축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도 시작됐다. 국립현대미술관, 목천건축문화재단 등에서는 은퇴 세대를 중심으로 한 아카이브 사업과 구술채록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이제 막 건축시장에 뛰어든 윗세대와 대척점에 서있는 젊은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도 대중 미디어를 통해 기록되고 있다. 저성장 시대에서 대형 프로젝트의 수가 줄어든 지금, 이슈는 건축물이 아닌 건축가에 초점이 맞춰진다. ‘젊음’이라는 모호한 개념적 범주에 놓인 이 단어는 불온하면서도 매력적이어서 미디어는 이를 건축의 새로운 표현 도구로 삼는다.
3년 전
누구에게나 젊은 시절이라는 것이 있지만, 개별 건축가들의 청년기 (혹은 데뷔기)가 아닌 상징적 집단으로서 ‘젊은 건축가’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2010년 이후, 여러 대중매체와 건축 전문지에서 젊은 건축가들을 다뤘다. 필자도 2011년 『SPACE』에 젊은 건축가들의 독립 계기와 그들의 작업 태도, 생존 전략 등을 소개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했다. 그로부터 3년 후, 여전히 그때 오갔던 이야기들은 유효한가? 어떤 다른 생각의 줄기가 뻗어나갔는가? 그 건축가들은 어떻게 성장해 갔는가?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당시 연재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재인용하는 것으로 젊은 건축가들의 시선과 그 의미를 다시 짚어보고자 한다. “건축으로 거창한 담론을 생성했던 때와는 분명 다른 것 같고, 가까이 있는 작은 것을 통해서 깊이있는 고민을 하려는 태도가 중요하게 다가왔다. 그것을 바로 독립되고 젊은, 새로운 실천이라면 그리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건축가 정현아),3 “건축=건물이라는 낡은 인식 속에 갇혀 있는 건축의 진정한 모습, 즉 조건과 상황을 대하고 풀어나가는 창조적인 사고방식과 태도로서의 건축, 그 폭넒은 스펙트럼 가운데 몇몇 지점을 선명하게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김상호 기자)4
지금
이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갖는다. 젊은 건축가들은 건축주와 직접 호흡하며 일상 영역에서 전시, 가구, 설치 등 실현 가능한 소규모 작업들을 진행하면서 건축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빠르게 발전하는 미디어의 양태에 주목하고 이것을 친숙하게 활용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예컨대 미술관과 같은 기관에서 젊은 건축가를 소개하는 작업은 이제 그 자체가 매체가 되어버린 건축을 만나는 일이다. 미술계에서는 이런 건축가들의 등장을 환영한다. 물론 최원준 교수가 지적했듯이 “도시설계, 인테리어 등 실제의 직능적 영역들을 건축이 잃어가는 상황”에서 젊은 건축가의 작업이 순수예술과 같은 고급문화 영역에 편중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다.5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실천이 높아질 수록 건축 매체를 둘러싼 실질적이고 생산적인 논의들, 예컨대 사진과 영상 등 2차 저작물의 저작권과 사용권, 기록의 도구와 아카이브 구축 방법론 등에 대한 구체적인 담론도 풍성해진다. 이것이 제도적 지원이 아닌 일시적인 열기일지라도 문화예술계에서 건축은 지금 가장 뜨거운 장르 중 하나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부터 시작하는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쿠마 켄고가 ‘파빌리온 계열’이라고 설명한 “건축이 아니라 미술관이나 갤러리 같은 예술 세계의 전시나 공간 구성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고 있는”6 젊은 건축가들의 모습이 이제는 친숙하다.

베아트리츠 콜로미냐가 『프라이버시와 공공성: 대중매체로서의 근대건축』(2000)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건축이 매체화되어 버린 것은 오래 전 일이다. 고 정기용 건축가가 지적했듯 “건축이 매체로 전락했다기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건축에 무엇을 실어 보내는가 하는 메시지에 있다.”7 기성 건축가들이 건축을 사유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젊은 건축가들은 일상에서의 실천과 이를 행하는 태도로 건축을 설명한다. 2011년의 기사에서 나는 이러한 젊은 건축가들의 지원을 위해 좋은 건축주와 개발사 외에도 후원자이면서도 기획자인 또 다른 주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8 하지만 지금의 현상은 건축가들 스스로가 기획자가 되어 판의 흐름을 바꾸는 모습이다. 공간의 쓰임을 기획하는 것은 건축가의 직무이지만 그 이상으로 사회를 매개로 건축을 기획하는 일이 인상적이다. 예컨대 셰어 하우스를 기획하고 분양하며 협동조합으로 운영되는 상점을 열기도 하며 집을 중개하는 등 건축가의 역할이 다양하게 표출된다. 이러한 일련의 젊은 건축가들의 선택은 결국 건축이 어떻게 사회와 소통하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여기에는 특정 건축주가 아닌 다수와의 접점을 찾고 싶다는 젊은 건축가들의 강한 열망이 숨어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의 소란 속에서 고군분투 하는 건축 현장과 이상의 간극 속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많은 이들과 접속하고, 이를 통해 공감을 받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보이지 않는 실체가 아닌 구체적 행위
결국 숱한 논의에서 필자가 한국의 젊은 건축가에게서 찾고자 하는 어떤 힘은 이들이야 말로 우리 건축의 외연을 넓히는 소리 없는 운동가라는 점이다. 선배 건축가들이 쌓아놓은 사유로서의 건축, 혹은 철학적 토대 위에 존재하는 건축의 의미론에 다른 색깔의 켜가 쌓인다. 이러한 운동은 조직적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내밀한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므로 사실은 매우 파편적이고 느슨하다. 따라서 젊은 건축가라는 우리 세대의 한 카테고리는 분석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젊은’이라는 미디어가 붙인 이름표는 누군가에게는 꽤 괜찮은 보호 장치이자 연대 의식을 높이는 장치였을 것이고, 언젠가는 떼어내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끊임없는 물음 속에서 우리 건축가들은 나름의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건축가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세대별 조건에 따라 건축을 이야기 하며 충돌과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이 결국 건축의 외연을 넓히는 하나의 동력이 될 것이라 믿는다. 건축을 해석하고,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는 다름을 만들어 내고, 경직된 건축계에 활력을 내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제는 젊은 건축가라는 어떤 보이지 않는 실체가 아닌 당대의 개인이 지시하는 행위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고인이 된 건축가 이종호의 말을 빌려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건축이 사회와의 접속이 차단된 상태에서 건축이라는 영역이 내부의 회로를 돌며 끊임없이 웅얼거리고만 있을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남는다. 바로 그 당위와 인식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소통의 필요성과 함께 실천을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어떤 연대의 필요성을 느낀다. (중략) ‘반란적 건축가’란 당신에게 어여쁜 삶을 권유하는 그런 건축가가 아니다. ‘반란적 건축가’란 오늘 우리의 도시, 건축의 공간이 드러내는 ‘분열’의 틈새를 비집고 희망의 씨앗을 꾹꾹 눌러 심는, ‘편집’의 껍데기를 한껏 밀어붙여 깨뜨려 나가는, 성찰을 반복하는 문화생산자 바로 당신이다. 그것이 오늘 건축을 하는 중요한 목적이다. 당신이 필요하다. 당신 곁에 내가 있고 싶다.”9
정다영
건축과 도시계획을 공부하고 월간 『SPACE』기자로 활동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건축 부문 전시기획과 연구를 맡고 있다
젊은 건축가, 소리 없는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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