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적 상상력의 가치
온영태
분량4,574자 / 10분
발행일2014년 6월 30일
유형오피니언
건축 시장은 갈수록 위축되고 전망도 어둡다. 획일적인 규제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도시 관련 제도의 완고함도 여전하다.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는 건축가들의 건축적 상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건축가 온영태는 계층 간, 도시 간의 양극화를 줄이고, 삶과 사회적 요구를 담아낼 새로운 정주공간을 만드는 것 역시 건축가의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건축 부재의 시대
새 세기가 시작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라도 할 것처럼 지구촌이 법석하던 2001년, 스페인의 건축 잡지에 실렸던 에세이가 하나 있습니다. 「변칙의 시절에In Irregular Time」1 라는 이 짧은 글은 바르셀로나의 실무건축계에서 벌어지는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애정 어린 충고를 담고 있었습니다. 글쓴이가 실제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탓인지 마치 우리 건축계의 이야기를 하듯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당시 바르셀로나 건축대학 인근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서적이 도면도 하나 없이 온통 컬러 사진으로만 구성한 건축 화보였는데 한꺼번에 100권 넘게 사가는 설계사무소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건축가들이 의뢰인에게 그 책을 한 권씩 주고 마음에 드는 부분을 골라오게 해서 설계를 쉽게 하려는 속셈이었겠지요. 이처럼 이 에세이는 마치 쇼핑센터의 소모품 판촉 행사 같은 설계 방식이 널리 퍼져 있음을 개탄하며 건축계에서 만연히 벌어지고 있는 행태를 열 가지가 넘는 유형으로 나누어 비판하고 있습니다.
유행의 바람을 좇는 ‘풍향계 같은 건축’, 도상에서 외피 조작 작업에 몰두하는 ‘스타일 습작 건축’, 과거 자유와 저항의 표상이었던 옷을 입고 시장 적응적, 현실 순응적 역할을 하는 ‘위장의 건축’, 수학·지리학·생물학·의학 등에서 빌려온 엉뚱한 개념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유추의 건축’, ‘건축 외적 이미지에 근거하여 그 존재를 정당화하는 건축’, ‘순간적으로 존재하다 사라지는 건축’, ‘출신 계파를 강변하는 건축’, ‘극단적으로 현대성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건축’, ‘대중의 취향을 지배하는 건축’, ‘서비스 회사로 전락해 버린 건축학교가 방출해온 건축’, 자신만의 낙관落款을 남기려는 ‘작가의 광적인 열망을 담고 있는 건축’ 등이 그것입니다.2 이처럼 이 에세이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고 다양하게 건축이 언급, 전시, 표명되고 있지만 정작 진정한 의미의 건축은 찾아보기 힘들어진 ‘건축 부재의 시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모순적 상황의 요인
건축의 과잉 속에서 건축의 부재를 걱정하는 이 모순적 상황은 대체로 두 가지 요인이 겹쳐지며 빚어졌으리라 짐작합니다.
하나는 금융자본의 거품 속에서 활황活況을 누리던 건축 시장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20세기 내내 ‘건축의 내적인 요구에 충실하라’는 모더니즘의 엄정한 교조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쟁이 그것을 대척할 새로운 이념으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소위 ‘모더니즘만 아니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면죄부를 제공해 준 것이 곧, 건축계의 지적 공백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이어진 시장의 활황으로 엄청난 양의 다양한 건물이 지어졌지만, 그것은 자본소득을 노리는 투자자와 소유주, 건설업자의 처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지, 건축가는 그들의 요구를 받드는 것에 분투해야 했습니다. 날로 심해지는 경쟁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건축가들이 선택한 차별화 전략은 바르셀로나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특히, 그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공공부문에서의 턱없는 명품 경쟁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건축가들에게 자리를 내주거나, 그들과 어쩔 수 없이 제휴해야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번엔 숨 돌릴 틈도 없이 금융권 한파가 시장을 위축시키면서 일거리 걱정이 건축가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침체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든 구조이기 때문에 쉽사리 벗어나기 어렵다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그렇다면 건축가들이 ‘사람들의 바람을 세상에 구현한다’는 본연의 임무에 종사할 기회는 영영 사라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건축가들의 ‘건축적 상상력’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로 접어든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목표지향적에서 과정과 장소 중심적으로
많은 사람이 양극화를 현대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경쟁력 있는 소수의 대도시로 경제적 부가 집중되면서 그렇지 못한 대다수 도시는 정체 혹은 쇠퇴를 맞이할 가능성이 큽니다. 소수의 대도시는 경쟁력을 유지 강화하는 과정에서 경제기반을 잃어가는 소외계층이 안정적인 삶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집중할 것입니다. 반면, 경쟁력을 잃고 정체 혹은 쇠퇴하는 도시는 도시경제 기반의 재구축과 근린 공동체 회복에 중점을 둘 것입니다.
서구 여러 나라는 이러한 일을 하는 데 있어 기존에 만들어진 시스템이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 아래 그 개조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과거 제도는 필요공간의 체계적 공급과 과도한 개발을 억제하기 위한 목표 지향적 계획체계와 획일적 규제 시스템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반면 참여 주체의 자발적이고 창조적 역량이 발휘할 수 있는 과정 및 장소 중심적 계획체계의 시스템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서구의 도시는 저마다 과제 해결을 위한 혁신적인 방안을 경쟁적으로 모색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건축가들의 활약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체계적인 분석과 합리적인 계획 기법이 새로운 문제 앞에서는 힘을 잃으면서 건축가들의 건축적 상상력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삶과 사회적 요구가 이제까지와는 질적으로 바뀌는 시기에는 건축적 상상력만이 그것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공간적으로 구현해 내는 방안을 보여 줄 수 있는 듯합니다.
좁아지는 건축가의 입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서구사회가 산업화에 따른 본격적인 변화 과정을 겪던 시기에도 그러했습니다. 당시 급격한 도시화로 몸살을 앓고 있었던 서구의 여러 도시에 새로운 형태의 ‘도시적 모듬살이’의 방식을 제안한 것은 뛰어난 건축적 상상력을 갖춘 인물들이었습니다.
새로운 정주유형을 제안하고 실천에 옮겼던 에버니저 하워드Ebenezer Howard, 목가적 분위기를 도시 속에서 실현하려 했던 레이몬드 언윈Raymond Unwin과 리차드 베리 파커Richard Barry Parker, 이들을 비롯해 누구보다도 뛰어난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새로운 도시적 모듬살이를 위한 공간창조에 몰두했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월터 벌리 그리핀Walter Burley Griffin,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폴 번햄Paul Burnham 등이 그들입니다.
그러나 현실주의자로 자처하는 젊은 계획가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등장하면서 건축가들의 발언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건축적 상상력이 차지했던 자리에 체계적인 분석과 종합적인 접근 방법이 들어섰습니다. 기능적인 도시city functional, 과학적인 도시city scientific, 효율적인 도시city efficient를 만들기 위한 지식의 체계화와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한 절차 및 방식이 제도화되면서 건축가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해결의 출발점은?
전환기란 말만큼이나 현재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산업화시대, 성장시대에 적용하던 패러다임이 더는 작동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사회적 요구를 담아낼 바람직한 정주공간에 대한 전망은 확실하게 서 있지 않습니다. 당면한 문제 해결에 급급한 관료들이나 과거 정보에 바탕을 두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계획가들의 한계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오직 건축적 상상력만이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건축적 상상력이 지속적으로 억압된 환경에서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선진 사회로부터 도입한 도시·건축 관련 제도의 본질적 성격과 그 운용방식이 억압적이기 때문입니다. 제도 자체가 목표 지향적 계획체계와 획일적 규제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 운용도 체계적인 분석과 합리적인 계획기법으로 무장한 계획가들과 관료들에게 맡겨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건축적 상상력이 발붙이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해결의 출발점은 건축적 상상력에 있습니다. 그것은 100년 전 서구에서의 경험과 최근 서구 도시가 겪고 있는 변화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과 사회적 요구가 질적인 변화를 겪는 시기에는 건축적 상상력만이 그것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공간을 구현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이 땅의 건축가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일거리는 줄어들고 있지만, 건축 본연의 일에 몰두할 길이 열리고 있지 않습니까?
온영태
서울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같은 대학교의 환경대학원에서 도시계획학 석사를 받았다. 그 이후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도시계획학 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에 재직 중이며, 도시 분야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분당 신도시 설계를 비롯하여 국내외의 여러 도시를 설계하였다. 역서 및 저서로는 『뉴 어바니즘 헌장』(뉴 어바니즘 협회 지음, 안건혁, 온영태 옮김, 한울아카데미, 2009), 『건축도시공간디자인의 사조』(제프리 브로드벤트 지음, 안건혁, 온영태 옮김, 기문당, 2010) 등이 있으며 다수의 논문이 있다.
건축적 상상력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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