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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이성의 (미)성숙과 소수자

홍세화

스스로의 만족에 갇힌 사람들

“‘회의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Douter, c’est penser.” 데카르트의 말에 비추어 볼 때,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회의하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은 부부 사이조차 설득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 부부는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확인했을 때 대화를 통해 드러내고 가깝게 지내도록 노력하기보다는, 차라리 덮고 지나가는 편을 택한다. 얘기를 꺼내보았자 합의를 이루기보다는, 말다툼으로 마감되는 경험을 주로 해왔고 또 하기 때문이다. 모두 자신의 기존 생각에 대해 회의할 줄 모른 채 고집하기 때문인데, 애정으로 맺어졌고 대화를 나눌 시간도 충분하고 계급적 처지도 동일한 부부 사이에서조차 설득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누가 누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는 아무도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또 아무도 스스로 설득 대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모든 사회구성원이 자신의 의식 세계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양 살아가는 것인데, 이런 양태가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이 된다.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눈 니콜라 드 콩도르세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믿는 사람’들에 가깝다. 이렇게 회의하지 않는 사람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기대하기 어렵듯이 자기성숙의 모색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 이들에게 ‘나는 남보다 낫다!’는 비교우위를 확인케 해주면서 자기만족에 머물게 해주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소수자들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른바 인공지능 시대에 살고 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무수히 만들어지는 세상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별로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이 모두 자신과 다르다는 점에 안도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도 않는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지 않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이 모순은 남보다 자기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만족하려는 인간의 저급한 속성에서 비롯된다. 자기의 우월성을 확인하면서 스스로 만족해하려는 저급한 속성은 필연적으로 나와 다른 남을 나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고 차별, 억압, 배제하도록 작용한다. 소수자가 다만 소수자라는 이유로 열등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소수자의 숙명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성숙하기를 기대하는 성찰이성에 눈을 뜬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다른 문화를 만날 때를 서로의 장점을 주고받는 성숙의 기회로 삼는다. 나아가 그가 속한 사회가 다양성을 꽃피우며 성숙한 열린 사회로 나가도록 기대하고 모색한다. 그러나 성찰이성에 눈뜨지 못한 사람은 자기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대신에 남과 비교하고 스스로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애쓴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되돌아봐야 하는 숙명을 지닌 소수자와 달리, 다수자는 다수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볼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실제로 돌아보지도 않는다.

구성원의 사회문화적 소양의 수준이 낮은 사회에서 즉자적인 비교를 통해 ‘내가 더 낫다’며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며 만족해하는 저급한 속성의 포로가 되기 쉬운 다수자에게, 소수자는 다수자의 비교우위를 확인하게 해주는 아주 손쉬운 대상이 된다. 자기성숙을 위해 내면과 대면하지 않는 사람에게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게 해주는 것은 그의 소유물이며, 그가 속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이 소유물과 소속 집단은 인간 내면의 가치나 성찰이성의 성숙과는 무관하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하여, 세상은 온통 다름의 진열장과 같고 다름을 존중하는 것이 내가 존중받기 위한 조건이지만, 물신이 지배하고, 성찰이성의 성숙 단계가 낮은 사회에서 다수자는 다름을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고 배제하는 데 동원된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 억압, 배제 행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거나 동원되는 것인데, 자신의 우위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동물이 아닌 ‘합리화하는’ 동물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 그런데 언제쯤 전쟁을 멈출 수 있을지 그 어떤 예언가나 사상가도 장담하지 못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이 이성의 동물이긴 하지만, 성찰이성에 비해 도구적 이성이 압도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라기보다 ‘합리화하는 동물’인 것이다. 인간 역사를 일면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와 착취의 역사’로 볼 수도 있다. 남녀의 다름을 우와 열의 관계로 매개하여 우등한 남성이 열등한 여성을 지배,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젠더는 다를 뿐인데, 다만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우등한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폭력이 정당화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남녀처럼 숫자가 비슷할 땐 그 다름을 우열관계로 매개한다면, 성소수자의 경우처럼 이성애자에 비해 소수일 땐 그 다름을 정상/비정상의 관계로 매개하여 비정상인 성소수자를 악마화 하거나 정상이 되도록 강제하는 것을 정당화해 왔고 또 하고 있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동성애자 사이의 결혼권이 보편화하였고 유럽보다 보수적인 사회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연방대법원이 동성애자 간 결혼을 합법화했는데, 한국에서는 동성결혼권은커녕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커밍아웃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억압과 배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보수적인 교회는 성소수자들을 비정상으로 보는 데 있어 앞서 언급한 콩도르세의 ‘믿는 사람’ 이상의 신념에 차 있는데, 여기에 개혁적이라는 정치권마저 휘둘리고 있어서 차별금지법 입법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형편이다. 18세기 사상가 볼테르의 말이 적절하게 다가온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광신자들이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슬기로운 사람들이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소극적인 것은 신중한 것과 다른 것이다…”

무릇 인간의 잘못된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비난하거나 비판할 수 있지만 존재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성소수자는 그렇게 태어난 존재일 뿐인데 다만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억압과 배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편, 사회화 과정을 통해 규정되는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최종적으로는 각자가 선택할 여지가 있는 신앙과 사상이 다른 경우에는 더 무서운 매개 고리가 작동할 수 있다. 즉 선과 악으로 매개하는 것이다. 나의 신앙이나 사상은 ‘선’이고 너의 신앙과 사상은 ‘악’으로 매개할 때, ‘악’은 세상에서 제거되어야 마땅하므로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 끔찍한 살육과 고문과 전쟁… 16세기 유럽에서 촉발된 신구교 간 종교분쟁의 양상이 그러했듯이, 20세기 한반도에서 벌어진 체제와 이념 분쟁의 양상이 또한 그러했다. 신앙과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살육하고 고문하면서도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악’을 제거하는 과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GDP 인종주의

“그래, 한 달에 얼마 벌어?” 전철에서 처음 만난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에게 어떤 이가 친근하다는 듯이 던진 질문이다. 같은 한국인 사이라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것이며, 설령 질문을 던진다고 해도 반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찰이성의 미성숙은 흔히 물신주의에 친화적인데,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주의는 국가경쟁력을 강조해온 국가주의 이념과 결합되어 ‘GDP 인종주의’의 모습을 띈다. 국민의 소득 수준으로 그 나라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처럼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의 사람은 ‘받는 것 없이 올려다보는’ 반면에,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대륙처럼 한국보다 못 사는 나라 사람은 주는 것 없이 내려본다. 그 올려다보는 각도는 내려다보는 각도의 정확한 반사각이다. 이 말이 품고 있는 뜻은 한국 사회의 ‘GDP 인종주의’를 극복하려면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에 대한 ‘우러름’과 못 사는 나라에 대한 ‘깔봄’의 양쪽 모두를 교정해야 한다는 뜻인데, 이는 동시에 양면 중 하나만이라도 철저히 공략하여 극복한다면, 다른 면은 자연스럽게 극복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자기성숙의 모색을 멈춰 자기가 속한 집단(의 우위)에 귀의할 때 이 문제는 계속 난제로 남을 것이다.

한편, 우리가 유럽, 미국, 캐나다 등을 ‘백인의 나라’로 알고 있는 만큼, 다민족 국가에 대한 인식이 빠져 있다. 히스패닉, 아시아계, 아프리카계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단일민족, 배달민족 등 한국 특유의 순혈주의가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경제 대국 13위에 걸맞지 않은 난민 수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난민 신청을 받기 시작한 1994년부터 2015년 말까지 22년 동안 신청자는 15,250명에 지나지 않는데, 576명 만이 난민으로서 인정을 받아 세계 최하의 인정 비율을 보였고, 다른 910명이 인도적 체류 허가 (난민과 달리, 가족결합, 자녀교육, 의료 등에서 혜택이 없는)를 받았을 뿐이다. (출처: 난민인권센터) 이러한 지점에서 〈어린 왕자〉를 쓴 쌩 텍쥐페리의 말을 기억하면 어떨까. “우리는 이 땅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니다. 우리 자손에게서 빌린 것이다.”

맺음말

“군자는 다른 채로 (획일화하지 않으면서) 화평하게 지내고, 소인은 서로 같아도 화평하게 지내지 않는다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공자님의 말씀을 기록한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이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인간의 지혜는 하나로 만난다. ‘다름을 차별, 억압, 배제의 근거로 삼지 말라’는 톨레랑스 사상과 ‘화이부동’의 동양 사상이 하나로 만나듯이, 우리는 모두 다르다. 그렇다면 거듭 강조하지만, 다름을 존중하는 것이 내가 존중받는 조건이 된다. 지상의 모든 꽃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뿐 그 어떤 다른 꽃을 시샘하지 않는다. 남보다 더 낫다는 비교 우위를 탐하기보다, 자기성숙을 위한 끊임없는 모색과 실천을 통해 각자 자신의 꽃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지 않을까.


홍세화 

20년 가까이 프랑스에서 정치적 난민 자격으로 체류했다. 귀국 후 난민인권센터NANCEN의 공동대표를 맡은 뒤 지금은 일반회원으로 남아 있으며, 〈르몽드디플로마티크〉 신문을 통해 세계 난민 동향을 살펴보고 있다. 현재 벌금형을 받은 사람들에게 벌금을 무담보 무이자로 대출해주는 장발장은행의 대표(은행장)를 맡고 있다.

성찰이성의 (미)성숙과 소수자

분량5,060자 / 10분

발행일2016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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