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 3인방의 기획 일지
조민석, 배형민, 안창모
분량15,943자 / 30분
발행일2014년 9월 30일
유형좌담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한국관은 원래 남북 공동전시가 플랜 A였다. 하지만 지금 전시 중인 《한반도 오감도Crow’s Eye View: The Korean Peninsula》는 만일을 대비한 플랜 B이다. 이상의 <오감도烏瞰圖>에서 착안한 이 전시는 건축가, 사진가, 컬렉터, 화가, 디자이너, 비디오 작가 등 다양한 작업을 통해 지난 100년의 한국 건축을 조망했다. 특히 분단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남북의 건축과 도시의 공통점을 건축가의 상상력으로 탐구하여 “훌륭하게 이상하다wonderfully bizarre”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커미셔너 & 수석 큐레이터 조민석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뉴욕 컬럼비아대학 건축대학원을 졸업하고, OMA를 포함해 유럽과 뉴욕의 다양한 건축 및 도시 계획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폭넓은 경험을 쌓았다. 1998년 제임스 슬레이드와 조슬레이드 아키텍처(뉴욕)를 설립해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했고, 2003년 한국으로 돌아와 ‘매스스터디스’를 열었다. 미국 젊은건축가상 (뉴욕건축가연맹, 2000), 미국 프로그레시브 아키텍처 어워드(1999, 2003)를 비롯해, 세계최우수 초고층건축상 톱5(<부티크 모나코> 2008, <에스트레뉴> 2010)를 두 차례 수상했고, 2010상하이엑스포 한국관으로 국제박람회기구 (B.I.E.)에서 수여하는 건축부분 은상과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다음 스페이스 닷 원>으로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과 한국건축가협회 베스트7상, 미국 아키타이저 에이플러스 상 등을 수상했다. 2011년에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유명전(Named Design)”을 안토니 폰테노와 공동기획하며 큐레이터의 경험을 쌓았다.
큐레이터 배형민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환경대학원을 졸업 후 MIT 건축학과에서 역사, 이론, 비평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에서 동서양의 현대건축사와 이론을 연구하고 있다. 첫 저서 『The Portfolio and the Diagram: Architecture, Discourse, and Modernity』(MIT Press, 2002)는 세계 유수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 『감각의 단면: 승효상의 건축』(2007), 『한국건축개념어 사전』(2012, 공동편저)이 있다. 건축전 기획 및 참여로는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부문 한국관(2008), 베니스 비엔날레 Common pavilion 프로젝트(2010), 베를린 Aedes 갤러리 김수근전(2011),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등이 있다. 현재 목천재단 현대건축 아카이브 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큐레이터 안창모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에서 한국 근대 건축을 공부하고 「한국전쟁을 전후한 한국건축의 변화에 관한 연구」와 「건축가 박동진에 관한 연구」로 각각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콜롬비아대학교와 일본 동경대학에서 객원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경기대학원에서 한국 근대건축 역사를 연구하며 ‘역사문화환경보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현대건축 50년』(1996), 『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2009), 『서울건축사』(1999, 공저), 『북한문화』, 『둘이면서 하나인 문화』(2008, 공저), 『서울건축가이드북』(2013, 공저), 『평양건축가이드북』(2012, 공저, 독일어, 영어판) 등이 있다.
진행 박성태 본지 편집인
초기 기획 과정
박성태 베니스 비엔날레 2014 한국관 큐레이터 세 분을 한자리에 모셨습니다. 황금사자상의 주역들입니다. 축하합니다. 전시 내용과 수상 소식은 여러 매체를 통해 보도됐습니다. 그런데 전시기획 과정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 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전시를 구성했는지 이야기 나눠보려 합니다.
안창모 오늘 이 자리가 의미 있는 건 전시 내용을 제대로 전달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제가 가진 시사적인 것만 부각이 됐지, 왜 건축가 조민석이 이 전시를 했는지, 또 어떻게 풀어나갔는지에는 관심이 적었던 것 같습니다. 이 전시를 기획하면서 큰 틀은 사전에 공유를 했지만 세세한 것까지 동의하고 시작하지는 않았거든요.
배형민 심지어 큰 틀도 서로 달랐죠.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응하는 방식에서부터 기획의도까지 서로 생각이 달랐어요. 물론 커미셔너 조민석의 기획의도가 중요하지요. 그런데 좋은 프로젝트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각각의 의지를 모아 구체적인 결과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늘은 원론적인 얘기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생산적인 것 같아요.
조민석 제가 커미셔너와 큐레이터로서 이 전시를 끌고 가는 입장은 구체적인 논지를 토대로 세부를 끼워 맞추는 과정이 아니었어요. 전시 자체가 목적이었다기 보다는, 과대망상적이라고도 여겨질 수도 있지만, 총감독인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던진 공통 주제, 즉 ‘지난 100년간의 모더니티의 흡수’에 관한 전시에 관해 숙명적이라 생각했던 남북 공동 건축전시, 즉, 플랜 A를 설정하고 이를 위한 실행 속에서의 우발성이 결과적으로는 중요한 과정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인지 플랜 A는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 소개하는 데 실패했지만, 지금도 결말을 본 전시가 아니고 계속 진행 중입니다. 나름의 고유 생명력을 가지고 놀라운 소식과 기회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있어요. 제가 바랬던 좋은 방향이에요.
박성태 최초 기획안에서 제안한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플랜 A와 플랜 B가 있었죠?
조민석 플랜 A는 남북 건축가 공동에 ‘의한’ 전시였고, 플랜 B는 북측이 응해주지 않을 경우의 대안으로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진 남북 건축에 ‘관한’ 전시였어요. 지난해 3월 제안 구상 과정에서 배형민 교수에게 내용의 리뷰를 받았고, 안창모 교수에겐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던지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어요. 결국은 플랜 A를 위한 접촉 과정에서 도움을 준 3국의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플랜 B에 포함되었습니다.
배형민 남과 북이 함께 한다는 전제하에 전시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의 전시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성사되지 않았던 플랜 A의 그림자라고 할까, 남북공동 전시에 대한 염원이라고 할까, 이러한 것들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성사된 플랜 B 전시가 플랜 A를 지금도 작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초기 기획의도를 실패라 얘기할 수 없어요. 콜하스가 국가관의 주제로 제안한 ‘근대성의 흡수 1914-2014Absorbing Modernity: 1914-2014’를 전제할 때 남북한 건축이라는 주제는 당위입니다.
박성태 보통의 전시는 주제에 따라 작가를 선정하고, 각 작업을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핵심이잖아요? 그럼 이번 전시는 이 틀을 벗어난 것인가요?
안창모 그렇죠. 완전 다르죠. 작년 12월까지는 플랜 A가 막판에 성사되면 지금까지 했던 것을 중단할 수 있으니 작가들에게 이해해 달라고 했는데, 대의가 있으니까 다들 양해해주었어요.
박성태 사실 틀이 완전히 짜이지 않은, 어느 쪽으로 전개될지 모르는 전시였죠. 초기 단계부터 세 분의 역할을 분담하기로 했나요?
안창모 역할을 분담하자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보는 순간 명확했던 것 같아요. 제 전공은 한국 근대 건축이고, 그중에서도 북한건축을 포괄하는 유일한 사람이죠. 당연히 그쪽에 대한 내용을 조율하고, 특히 남과 북의 미묘한 정치적 문제 때문에 수위조절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명확했던 것 같아요. 정확하게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해도 충분히 토론하고 논란을 일으키면서 계속 프로젝트가 진행되었고, 그것이 끝난 다음에도 계속 이어지는 구조는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조민석 저는 이 역사적 사실들의 온전한 ‘조감’이 불가능한 특수한 상황에서 접근해 봄직 한, ‘어떻게’에 관한, 즉 제 나름의 전시를 위한 특정한 방법론과 태도를 초기에 어렴풋이 제시했던 것이고요. 이 특정한 ‘무엇’, 즉 방대한 역사적인 지식에 관해서는 무지했지요. 안창모 교수의 역할은 어디로도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지식의 무게에 의한 평형수라고 할까요. 안 교수는 지난가을에 대학원생들과 이 주제에 관해 세미나를 했어요. 또 우연히도 지난해 황두진 건축가가 주최하는 ‘영추포럼’의 주제도 북한 건축이었고, 박성태 국장도 함께 관심을 가져주었고요.
배형민 이번 비엔날레에 참여한 몇 개의 국가관을 보면 건축전시 방법론의 주요 전형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미국관은 개념에서 출발했고, 독일관은 전시 설치의 건축 자체에 승부를 겁니다. 일본관은 전형적인 아카이브 전시이고요. 전시물에 역사적 의미가 안정적으로 축적되어 있어서 객체와 의미가 일대일 대응한다는 전제가 있어요. 그래서 전시물이 아카이브적 가치가 있을 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거기에 탄탄한 역사적 해석이 담겨 있어, 전시에 내놓으면 그 전시물이 왜 중요한지를 알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런 전시가 답답할 수 있어요. 저는 일본관에 들어가면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서 숨이 막히는 것 같더라고요. 공부하는 장소로서는 좋을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전시환경으로서는 좋지 않았어요. 일본의 아카이브 전에 대상과 의미가 일치되어있다고 한다면 한국관은 전시물과 의미에 큰 간극이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전시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 한국관의 기획팀이 작동하는 방식과 연관이 있습니다.
안창모 그게 굉장히 중요한 핵심인 것 같습니다. 창피한 얘기지만, 저는 베니스에 가기 전까지도 이번 비엔날레의 전체 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가 별로 없었어요. 베니스에 가서 몇몇 국가관의 설치작업을 보고 주변을 돌아다니고 나서야 전체 그림이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특히 장-루이 코헨을 만났을 때가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사실 다른 나라들은 주로 이론가를 커미셔너로 선정하잖아요. 그런데 한국은 그해의 비엔날레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커미셔너를 선정하기보다는, 관행에 의해 주요 건축가를 커미셔너로 뽑았습니다. 우리가 준비하면서 전시하고 얘기할 때 놓치는 것은 몇몇 사진이나, 재료는 우리 전체 맥락에서 서로 충돌하고 다른 얘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가 전시 곳곳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건축가의 감성이 아니었으면 학자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배형민 전시 개념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기획이 진행되면 안 되죠. 건축설계도 건축이 콘셉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요. 말과 이미지, 책과 공간이 서로 다르니까요. 어떤 전시든 큰 아이디어는 있겠죠. 그러니까 말과 생각의 세계와 건축과 오브제의 세계, 서로 거리를 둔 채 그 어느 쪽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독자적인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관을 기획하면서 양자가 만나 총체적인 전시 환경을 만드는 과정이 무척 좋았어요. 무엇이 좋은 건축 전시인지 전시의 총체적인 경험은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에 대한 철학과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말이죠.

건축을 통해 보는 남과 북
박성태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전은 모형, 이미지, 도면을 놓고 건축가가 어떤 일을 했는지 관람객이 와서 보고 느끼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번 전시는 그렇지 않은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형민 도록에 실은 에세이에 제 입장을 잘 정리했습니다. 저는 북한건축을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이 전시의 큐레이터로 일할 수 있었느냐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자격상실 요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민석 소장이 커미셔너이자 수석 큐레이터의 역할을 했고, 그를 중심으로 작가와 작품, 전시 대상을 물색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주제나 기준을 갖고 찾은 것은 아니었어요. 조민석 소장의 성격이기도 해요. 전체적인 그림이 있을 수도, 또 없을 수도 있겠지만 개별적인 매력에 이끌려 우선 고려 대상이 되었지요. 예를 들어 조민석 소장은 문훈의 작업을 처음부터 전시하고 싶어 했어요.
조민석 건축가 문훈의 스케치를 막판 올해 2월에 포함했죠. 이와 <유토피아적 관광Utopian Tours> 중의 닉 보너Nick Bonner 컬렉션, ‘Commissions for Utopia’와 기묘하게도 대칭을 이루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배형민 문훈의 드로잉은 그 자체에 감각적인 정서와 세계가 있잖아요. 그의 그림이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그럼에도 조 소장이 처음 제안했을 땐 안 교수나 저나 갸우뚱했어요. 그리고 조민석 소장도 문훈을 취할 논리가 없다는 것을 당연히 알아요. 그러다가 닉 보너의 ‘Commissions for Utopia’의 그림들을 보는 순간 문훈의 그림들이 전시에 들어올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거죠. 그렇지만 이런 기획 과정이 논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과정을 수도 없이 거쳤습니다. 그다음에는 전시물을 정리해야 하잖아요. 다시 말해, 전시 공간에 배치해야 책(카탈로그) 안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제가 카탈로그를 편집하면서 <삶의 재건Reconstructing Life>, <기념비적 국가Monumental State>, <경계들Borders> 등의 주제를 만들었고 닉 보너의 컬렉션을 별도 섹션으로 독립시키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전시물이 먼저였고 그것을 묶는 개념이나 역사적인 주제는 나중에 나왔어요.
박성태 참여작가를 많이 초대하는 것에 대부분 동의를 하고 가셨나요? 왜냐하면 전시장이 한정된 공간이잖아요.
안창모 저는 큰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 작가의 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배형민 작업들이 공간 안에서 설치되는 방식은 조민석 소장이 해결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조민석 이에 관한 재밌는 일화가 있어요. 준비 초반에 강익중 작가가 끝까지 반을 비워 놓고 가자고 제안했어요. 북한 건축가들의 직접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끝까지 기다리자는 뜻으로 말이죠. 그런데 몇 달 뒤 뉴욕에서 만난 박경 교수도 똑같은 얘기를 해서 확고해졌죠. 하지만 최종 설치계획 과정에서 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설치 양에 비해 물리적인 공간이 협소하다는 이유보다는, 서사 자체가 너무 극적인데 굳이 이것을 더 극화할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이에 관해서는 배형민 교수의 에세이에서 “차고 넘칠 정도로 꽉 찼는데 비어있다”고 한 것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결국, 김석철 선생이 설계한 한국관의 복잡다단한 공간 안팎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이용하면서 강렬한 자료들을 담당하고 따뜻하게 보여준 것에 좋은 반응들을 보여주셨어요. 건축 전시를 책으로 도배한 것으로 보일까 하는 우려도 있었죠. 준비 과정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마다 보는 분들이 ‘나열식이 아니냐’, ‘분량이 너무 많지 않겠느냐’하는 걱정을 항상 하기도 했고요.
배형민 남과 북에서 온 수많은 작업들을 어떻게든 함께 구성해야 하잖아요. 남과 북으로 공간을 가른 상태에서 북이 참여를 안 하면 북을 비워두자는 얘기까지 나온 거고요. 저는 이런 논리가 전형적인 개념 오류라고 생각해요.
박성태 만약에 그 구도로 간다면 남한의 콘텐츠로는 무엇을 생각하셨나요.
배형민 그림이 안 그려지죠. 그것은 말만 그럴듯하지 실제 전시를 한다면 얼마나 우습겠어요.
안창모 남과 북의 전시가 남한의 전시물이 북한 건축물 문제로 드러난 부분이 굉장히 강하고 북한건축도 마찬가지로 남한 건축물 배경으로 드러난 것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반을 비우는 것은 개념적으로 멋있어 보이지만 내용상 어필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왜냐하면 북한도 남한도 잘 모르는 상태인데, 관객으로선 어느 한쪽만 보면 전시내용을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되죠.
배형민 개념으로 출발한 전시의 전형은 보자마자, ‘아, 그래 알았어’하고 그냥 가버리게 돼요. 한국관이 그런 전시가 되면 안 되죠. 하지만 지금의 전시에서도 남북 공동이라는 처음의 전제가 계속 남아있다고 생각해요. 가지 못했던 길들, 이루지 못했던 것들이 그림자처럼, 그리고 생명력을 가진 유전자처럼 지금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박성태 만약 플랜 A가 가능해져 북한 건축가들이 와서 남한과 북한의 건축가가 각각 절반씩 공간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요?
조민석 제 최초 기획안에도 제시했었고, 책 마지막에도 ‘Open Letter to Architects of North Korea’를 통해 언급한 것인데, 바로 ‘온돌’을 소재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번에 심사위원장이셨던 유네스코의 프란체스코 반다린 회장님께도 시상식장에서 말했어요. 마침 남한이 온돌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하려 하는데, 온돌은 특정 지역이나 건축물이 아닌 한반도 전반의 기술 유산이니 남과 북이 함께 등재하면 좋겠다고요. 콜하스의 《건축의 요소Elements of Architecture》 전시가 보여준 것처럼 온돌 하나만 가지고도 풍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죠. 건축에서는 작은 일부일 수 있지만 깊이 들어갈 수 있죠. 이외에도 무궁무진한 주제가 있겠지만 좋은 시발점이 될 수 있지 않겠어요? 국기 두 개 나란히 걸고 하나의 공통 주제로.
안창모 남북이 같이 하면 전혀 다른 톤으로 갈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굉장히 역사적인 사건이죠. 그럼에도 실현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잘 아시다시피 남북 관계가 너무 좋지 않았고, 다음으로 예산이 부족했어요. 극히 현실적인 문제죠. 그럼에도 만약 성사된다면 역사적으로 굉장히 충격적이고 큰 사건이겠지만, 내용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또 어려운 전시가 됐을 거예요.
조민석 그런데 해 보는 것이 중요하겠죠. 정치나 이념의 문제를 정면으로 부딪치는 부분이 아니고 빗겨 나갈 수 있는, 시작해 봄 직한 주제라는 거죠. 국가관에서 은사자상을 탄 칠레의 프리캐스트 콘크리트Precast concrete에 대한 《Monolith Controversies》 전시도 건축공법 하나를 매개로 정치적 상황을 빗대어 보여주거든요. 전시라는 것은 굉장히 창의적인 영역이잖아요. 어떤 합의된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면 하나의 건축 기술만을 주제로 삼아 전시로서 충분히 서사를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배형민 이루어지지 못한 전시에 대해 가설적으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전혀 다른 전시가 되었겠죠. 10년 후 쯤 남북 공동 건축전이 실현된다면 그때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다른 역학에 따라 전시가 열릴 겁니다.
박성태 사실 전시 준비는 원래 플랜 B가 아닌, 플랜 A로 갈 생각으로 기획했었죠.
조민석 원래 플랜 A의 데드라인이 2013년 10월이었어요. 그래야 운송 기간 빼고 구체적인 전시 준비를 6개월 정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12월 말까지 계속 간 거예요. 실은 더 연장할 욕심과 미련도 있었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목표는 터무니없게 짧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비엔나의 피터 노에버Peter Noever 전 MAKMuseum of Applied Arts 관장이 평양 국립 미술관 소장전을 MAK에서 하게 된 준비 기간은 5년이었어요. 그 기간 동안 북한을 7번을 방문했고요. 이 경우 전시를 언제 열어야 한다는 데드라인이 없었죠. 또 다른 예로 분단 기간 동서독의 건축을 비교한 《Two German Architectures 1949-1989》(2013) 전시는 저도 커미셔너가 된 후 리서치 과정에서 알게 되었는데 제가 애초에 상상했던 플랜 A와 가장 흡사한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큐레이터의 글을 보면 독일 양측의 건축 역사에 대해 이론가로 구성된 기획팀이 어떠한 방식으로 전시 구성을 할지를 두고 오랜 기간에 걸쳐 고민한 흔적이 잘 드러나 있어요. 분단 시기를 건축의 틀을 통해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문제를 두고 기획팀은 긴 논쟁 끝에 시대적 구분이나 지역적 구분이 아닌, 건축 담론에서만 가능한 분류 방식, 즉 주거, 산업, 교통 인프라 등 다섯 가지의 건물 유형 분류 방식으로 나누어 접근하기로 동의하죠. 그들 식의 합의를 통해 전시를 구실로서 온전한 조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통독 후에도 14년이나 걸린 거예요.
박성태 큐레이터가 큐레이팅을 할 때 전시 대상에 관한 스터디가 충분히 되어있는 상태에서 하잖아요? 그런데 이번 전시는 어떻게 보면 북한이라는 미지의 대상을 다루었습니다.
안창모 그렇죠. 적어도 제가 보기에 조민석 소장이 이 주제를 중심으로 확실한 자신이 있었다면 제게 같이 하자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조민석 서사를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전시 기획자를 영화감독에 비교할 수 있다면, 제가 영화감독이 되어 아폴로 영화를 찍는데 NASA 과학자의 지식을 가져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안창모 교수를 비롯한 다양한 전문가가 필요했던 것이고요. 제 방식은 가능한 과거 자료들의 수집과 배열에서 나아가 현실에 개입해서 새로운 자료들을 만들어 나가는, 굳이 비유하자면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 감독식의 다큐멘터리 방식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전형적인 아카이브 전시와는 달라요. 전시물 중에는 적극적으로 어렵사리 현실에 개입해서 만들어 낸 것들이 있어요. 이 측면이 시상식에서의 심사위원장의 평한 “Research in Action”에서 간결하지만 분명히 표현됩니다.
리서치와 공간 디자인
박성태 디스플레이 결정을 한국에서 이미 하고 가셨나요? 아니면 현지에서 하셨나요?
조민석 저로서는 처음 기획한 외국에서의 전시여서 못 하나까지 철저히 준비했어요. 한국관 현장에서 도착한 상자들을 펼쳐볼 때 아주 뿌듯했죠. 고맙게도 팀원들이 그림 하나하나 포장, 레이블 등 안 보이는 것들까지 나름 엄청난 프로페셔널리즘을 발휘했어요. 대부분 경험이 많은 이들이 아니었는데도. 단지 닉 보너 방이 오래된 건물이라 그렇게 기울어져 있을 줄 몰랐죠.
안창모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조직적으로 준비가 잘 된 전시는 처음이었어요.
조민석 우리 팀의 스피릿spirit이 좋았어요. 현장에서 중요한 수정도 몇 가지 하긴 했어요. 개막식 행사 기획을 구체적으로 현장에서 하면서 외부 입구 부분 배치를 바꾸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그대로 갔어요.
배형민 어려운 상황들을 풀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동력원은 그래픽 디자이너 ‘슬기와 민’이었어요. 복잡하고 산만한 내용을 편집 디자인으로 가독성과 가시성을 부여해준 것은 슬기와 민의 탁월한 능력이에요.
안창모 구세주였어요.
배형민 자기 분야에 철저하면서 남의 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조 소장이 건축가이지만 학자의 이야기를 다 알아들어요. 나는 학자지만 설치를 보면 공간을 읽을 줄 알아요. 슬기와 민은 그래픽디자이너로서 전체 맥락과 콘텐츠를 다 읽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도록 디자인이 가능했죠. 끊임없이 대화하고 논쟁했죠. 서로가 다른 영역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지만 각자가 맡은 전문 영역에서 최종 결정을 누가 하는 것인지 확실합니다. 전시 기획의 조직이 잘되어있는 것입니다. 결정 시스템이 잘 되어있으니까 어떤 사안이 논란이 되더라도 누가 그 문제를 최종 결정하는지 알아요. 그러니까 일이 되는 거예요. 역할 분담이 분명하고 서로가 뭘 하는지 아는 상태죠. 사실 그렇기가 쉽지 않아요.
박성태 디스플레이에서 원칙이 있나요?
조민석 전시 설치의 원칙이 생기게 된 가장 큰 요인은 김석철 선생의 한국관 설계 자체가 남북 분단 서사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에 기인해요. 커미셔너가 되고 2013년 6월 준비 차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오프닝 때 갔을 때 당시 한국관 커미셔너였던 김승덕 선생이 알려줬어요. 아시다시피, 지아르디니의 26개 국가관 중 영국, 일본, 독일, 미국과 같은 선발 국가들의 국가관은 120년 전부터 먼저 가장 좋은 자리에 전시 공간으로 쓰기 좋게 지은 장방형 평면의 반듯한, 즉 코너가 네 개뿐인 건물들이죠. 마지막으로 땅도 남아있지 않고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에서 어렵사리 끼어들어간 한국관의 평면을 보면 코너만 무려 19개예요. 그 코너들을 안팎으로 다 세면 결국 38개란 얘기죠, 어쨌든 3m 이상 긴 벽이 없어요. 유일하게 긴 벽 하나는 기존 나무를 피해서 짓느라고 S라인을 그리고 있고. 더구나 베니스 시에서 바다의 전망을 막지 말라고 해서 이 토막 난 벽들의 반 정도는 유리구요. 한반도 자체를 이 건물은 참 많이도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강대국들 사이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자리에 어렵사리 껴서 뭍과 물을 양쪽에 면하고 복잡한 리아스식 가장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이전까지의 건축 전시의 대부분은 이 유별난 공간을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는 것이었죠. 우리는 이 의미 있는 건물에 구조물을 추가하지 않고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역대 한국관 전시 중 가장 많은 전시 아이템들을 배치하는 것이 큰 이중 과제였지요. 그러다 보니 애당초 선형적, 병렬적 서사 전개는 불가능했고요. 반대로 이 건물의 공간 구조를 그대로 밭아 들여 서사의 틀로 최대한 이용하는 게 목표였어요. 반도니까 앞, 뒷문을 다 열어 넣고… 결국 전시 공간 디자인의 모티프는 코너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안과 밖의 38개의 코너들은 각 작업 사이에서 의미들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죠. 전시물들 사이의 행간에는 알면서도 못할 말도 있고, 정말 무지해서 못 쓴 말도 있고, 그리고 어떤 종류의 공통점이 예기치 않게 발견될 때 나오는 웃음도 있었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프리뷰 기간 동안 건축가로서 특별한 경험을 했어요. 건물은 지어 놓고 나서 건축가가 평생 항상 옆에 서서 의도를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건물 자체가 말 없는 말을 하는 것이지. 그런데 반대로 이 프리뷰 기간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이 와서 관심을 가져주니까 제가 구성한 공간 안에서 전시 가이드 기계가 되어 밥도 건너가며 무수히 반복해야 했어요. 두 주 후 한국에 돌아와보니 2kg가 빠질 정도의 일종의 퍼포먼스 강행군이었어요. 이 과정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들을 살펴보는 것이었죠. 프리뷰 기간 방문객의 대부분은 열려있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른바 건축계 식자들인데 그들 속에서도 몇몇 특정한 전시물에서 맞닥치면 미묘한 반응의 차이들이 감지되었죠.
배형민 이것은 어긋난 사물들이 함께 있을 때의 효과인 것 같아요. 정답이 없기 때문에 관람객들이 반응하는 방식이 굉장히 달라요. 더군다나 일반 오프닝 전에 세계 건축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프리뷰 때 찾아오는 사람들이 모두 큐레이터, 학자, 건축가이기 때문에 그들이 와서 보고 느끼는 반응들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관람객들이 통념을 버려야 한다 점이에요. 남북한 주제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통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성태 전시 콘텐츠를 보면 건축만 넣지 않으셨잖아요? 비중의 판단은 어떤 기준을 두고 했나요.
조민석 플랜 A가 성사되었다면 ‘김수근과 김정희’ 식의 건축가에 대한 전시가 될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김정희 아카이브를 못 가져오니까 아티스트 서현석이 가능한 자료들을 끼워 맞춰서 영화를 만든 거였어요. 또는 알레산드로 벨지오조소Alessandro Belgiojoso를 비롯한 여러 명의 사진작가 크레딧으로 전시가 구성돼요. 사진을 비롯한 몇 가지 매개 방식으로 건축에 관한 전시물을 구성하게 된 거죠. 29명의 작가라 하지만 이중 건축, 도시 전문가는 10명도 안 돼요. 나머지는 다양한 매체와 방식으로 피처링을 한 분들이죠. 사실 전시된 작품의 실제 작가 수는 100명도 넘을 거예요.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이런 방법이 만들어진 거죠.
박성태 현장에 가면 ‘이건 건축전이다’ 하는 느낌이 있나요?
배형민 한국관은 건축전시 같지 않아요. 건축전시로 보면 그 호소력이 제한됩니다. 건축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지, 건축 자체가 대상이 아닙니다. 각국 대사들이 관심을 가질 정도니 건축을 하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할 수 없는 거죠. 하지만 북한의 실제 건축 모형들은 가지고 올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호소력 있는 전시를 기획했다는 것은 큰 성공이라 생각합니다.
박성태 닉 보너 컬렉션만이 하나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지 나머지 작가들은 어떤 내러티브에 의해서 디스플레이가 된 건가요?
조민석 연속적인 서사라기보다는 일종의 패치들이에요.
배형민 왜 그렇게 된 건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창모 교수가 다루고 싶었던 주제가 평양과 서울의 비교예요. 전시 주제로 설정되지는 않았지만 카탈로그의 에세이에는 잘 정리되어 있어요.
조민석 도록하고 내용은 거의 같지만 그러나 서사 전개는 상반되는 보완 관계죠. 도록의 자체 논리는 배형민 교수가 잘 풀어주셨고, 전시 디자인은 주어진 조건들을 가지고 먼저 제가 시작한 상태에서 양측의 논의를 통해 각각 마무리 되었지요. 즐거운 과정이었죠. 둘 다 ‘행간 효과’는 강하게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같은 전시 공간과 달리 책을 보면 비교적 간명하지요. 이게 글이 가진, 공간과는 다른 힘이기도 하구요.
배형민 카탈로그는 책이니까 책의 생명력과 논리로 만들고, 전시는 공간과 이미지의 논리이니 서로의 역할이 따로 있는 겁니다. 일반적인 전시 카탈로그는 아주 지루해요. 사진집, 앨범 같잖아요. 그런데 우리 한국관의 카탈로그는 자체의 논리가 있기 때문에 독자적인 책의 힘을 갖고 있어요. 남북한 건축에 관한 첫 책 아닌가요? (웃음)
자체 평가
박성태 자체 평가를 한다고 한다면 어떠세요? 어떤 느낌, 생각 드시는 대로 말씀해주세요.
안창모 나는 여전히 우리는 북한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양과 우리는 지금도 다르지만 ‘역사적, 태생적으로도 다른 도시다’라는 거죠. 태생적으로 다른 도시고. 첫 번째 조선이 고조선이었고. 그것도 조선이었죠. 두번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그리고 제3의 조선이 북한이죠. 제2의 조선과 제 3의 조선은 전혀 다른 것 같지만 유사한 측면이 있어요. 제2의 조선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하는 국가를 유교를 지배 이데올로기하는 국가로 만들면서 불교형 인간을 유교형 인간으로 바꾸기 위한 시도를 도시와 건축 속에 투영시켜서 오늘날의 서울을 만든 거예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제 3의 조선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이상을 현재의 평양에다가 만든 거예요. 그렇게 만든 것이 우리 서울과 얼마나 다른가 보여주는 구조라서 제 3의 조선이라고 생각했죠. 여전히 우리는 북한을 잘 모르고 북한을 잘 아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이 들어요. 그런 면에서 자기식대로 북한과 서울을 보게 하는 이만한 전시는 없는 것 같다. 답이 어차피 없는 상황 속에서 그런 생각도 가지고 있어서 하나로 정리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여전히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배형민 동감입니다. 나는 개인적인 얘기로 마무리를 할게요.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뭔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해요. 예전에는 나는 학자고 글을 쓰는 사람이고 가끔 큐레이팅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동안 직함에 큐레이터를 넣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개인적인 질문이고 고민이지만, 건축 전시의 지적인 작업이 건축계와 학계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널리 분출되고 발현됐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아직은 답이 제대로 나오진 않아요. 하지만 지난 몇 년간 경험을 통해 전시기획에 대한 저의 태도가 다져진 것 같아요. 물론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만은 아니에요.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작게는 작년에 이스탄불에서 기획했던 승효상의 노무현 묘역 프로젝트 등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어떤 철학과 방법론을 갖고 큐레이팅에 임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은 큰 힘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이라도 건축 전시론을 쓰라고 하면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큐레이터 직함을 내걸 수 있을 것 같고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기 그런 계기가 된 것은 영광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조민석 분단 현실에 관해 저는 관심은 있었지만 세대적 한계로 피상적인 부분들이 있었지요. 제일 처음 전시 제안 과정에서 매우 좋은 단초가 되어 주었던 것이 올해 만 100세가 되신, 종종 찾아뵙는 박용구 선생님의 구술 책, 『한반도 르넷상스의 마스터 플랜』이었어요. 1914년 생으로 문화계에 투신하셨던 그 분이 뒤돌아보는 이곳의 시공간은 저와는 너무나도 다른 거예요. 31세까지는 분단 전의 한반도에 사셨던 분이니까요. 전시 과정을 통해 제가 건축가로서 속해있는 이 곳에 관해 보다 조금은 더 구체적이고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크게 보면 우리가 했던 일이 어떠한 종류이던 간에, 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세상의 일부를 어떠한 창의적이거나 문화적인 방식을 통해 이해하고, 그 결과로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온 역사 속의 무수한 시도들의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이번 비엔날레 전시를 계기로 건축이 그 중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확인, 격려가 되었고, 또한 이와 비슷한 목적으로 건축가의 길을 택한 저에게는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큐레이터 3인방의 기획 일지
분량15,943자 / 30분
발행일2014년 9월 30일
유형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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