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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건축가 재조명의 이유

임재용

한국의 동시대 건축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국제적 인프라의 부실이다. 국제 규모의 행사에서 건축가의 역할이 큰 맥락의 기획자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과 현대건축 선배 세대의 건축 유전자를 재평가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끌어내려는 노력이 미흡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건축가 임재용은 내년 서울세계건축대회를 통해 한국의 근대건축가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사무실로 일본에서 전화가 왔다. 이시가미 준야라는 일본 건축가가 서울에 건물을 설계하는데, 현지 담당 건축가가 되어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우리 사무실을 접촉하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좋은 건축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파트너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게 뭐지? 이제 국내 건축주는 소규모의 건축도 해외 건축가에게 맡기나? 한국에도 좋은 건축가가 많은데. 그리고 그 많은 뒤치다꺼리를 우리가…?’ 우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쩌다가 한국 건축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오가면서 멍해졌다.

몇 년 전 동년배 일본 건축가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최근 한국 건축이 좋아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 것 같은지 물었다. 그 친구의 답변은 일본에는 선배들이 미리 길을 잘 닦아 놓아 젊은 건축가들이 실력만 있으면 세계무대로 나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한국 건축계에는 그런 국제적 인프라가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다. 당시 그냥 흘려들었던 이야기가 요사이 점점 피부에 와 닿고 있는 듯하여 안타깝다. 그 친구의 분석으로는 일본 건축이 세계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1964년 동경올림픽을 위해 단게 겐조가 설계한 경기장이 세상에 알려지면서부터라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단게 겐조가 1959년 CIAM 회의에서 일본의 메타볼리즘1을 소개한 것이 더 큰 사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건축이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데 동경올림픽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후 단게 겐조가 1987년 프리츠커상을 받았고 일본은 이후에도 네 명의 수상자를 더 배출했다.

그럼 동시대 한국 건축계는 어떠했나? 1962년 〈프랑스 대사관〉, 63년 〈자유센터〉, 68년 〈세운상가〉, 69년 〈삼일빌딩〉 등 뛰어난 작품들이 완성되었으나 세계의 이목을 받지 못한 것은 아마도 국제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채널이 많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은 동경올림픽이 열린 지 24년이 지나서이다. 동경올림픽 당시 요요기 경기장을 설계한 단게 겐조는 당시 46세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지만, 88년 서울올림픽 때에는 김수근, 김중업 선생이 모두 작고하고 없었다. 두 분이 살아계셨다면 각각 70세, 57세였다. 두 분이 너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쉽게도 한국 건축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또 다른 국제 행사인 엑스포를 예로 들어보자. 1970년 오사카엑스포에서 단게 겐조와 니시야마 우조(Nishiyama Uzo)는 엑스포를 위한 도시계획자로 지명되어 12명의 건축가와 함께 건축·도시적 실험을 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도 1993년 대전엑스포와 2012년 여수엑스포를 개최하였으나 건축에서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단게 겐조의 협력할 줄 아는 리더십과 전략이다. 그의 나이가 당시 57세로서 충분히 독자적으로 작업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엑스포 프로젝트를 이론가인 니시야마 우조와 12명의 건축가와 공동으로 작업했다. 또한 그는 단순히 건축가로서가 아니라 도시계획자로서 참여했다. 그는 이미 건축이라는 것이 크게 도시와 주변 프로그램을 기획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실천한 것 같다. 요사이 한국 건축가들이 국가 대형 프로젝트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프로젝트의 기획자 혹은 더 넓게는 도시계획자의 맥락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건축가로서만 접근하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건축가인 김중업, 이희태, 김수근을 세계 건축계의 흐름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 1913 단게 겐조(1913–2005)
  • 1922 김중업(1922–1988)
  • 1925 이희태(1925–1981), 로버트 벤추리(1925–)
  • 1926 제임스 스털링(1926–1992)
  • 1929 프랭크 게리(1929–)
  • 1930 찰스 코레아(1930–2015)
  • 1931 김수근(1931–1986), 아라타 이소자키(1931–), 알도 로시(1931–1997), 리카르도 레고레타(1931–2011)
  • 1932 피터 아이젠만(1932–), 헤르만 헤르츠버거(1932–)
  • 1933 알바로 시자(1933–), 리차드 로저스(1933–)
  • 1934 기쇼 구로카와(1934–2007), 마이클 그레이브스(1934–2015), 한스 홀라인(1934–2014), 리차드 마이어(1934–)
  • 1935 노만 포스터(1935–)
  • 1937 렌조 피아노(1937–), 라파엘 모네오(1937–)

이 표를 정리하면서 크게 놀라는 동시에, 본인의 역사적 무감각이 부끄러웠다. 김중업, 이희태 선생은 역사 속의 인물인 것 같은데 동시대 인물인 로버트 벤추리는 아직까지 생존해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김수근 선생보다 2년 일찍 태어난 프랭크 게리도 왕성히 활동 중이고, 1년 일찍 태어난 찰스 코레아는 작년에 작고했다. 김수근 선생의 동시대 인물들은 어떤가? 1931년 동갑 중에 아라타 이소자키 역시 현업에서 활동 중이고, 알도 로시와 리카르도 레고레타는 5년 전 작고했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는 바로 최근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던 현대건축가이다. 1932년생인 피터 아이젠만과 헤르만 헤르츠버거, 그리고 1933년생인 알바로 시자와 리처드 로저스는 아직도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들이다. 이후에 태어난 리처드 마이어, 노먼 포스터, 렌조 피아노와 라파엘 모네오는 아직도 건축의 역사를 계속해서 써내려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김중업, 이희태, 김수근의 건축 작업은 아쉽게도 오래전에 멈췄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흔적은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6월 11일 경동교회에서 〈김수근 30주기 추모전: 지금 다시 김수근〉 행사의 일환으로 김수근 심포지엄이 열렸다. 심포지엄에서 나왔던 이야기의 골자는 이렇다. 그동안 김수근의 건축을 그의 제자나 소위 내부자의 영역에만 머물던 것을 끄집어내어, 이제는 한국 건축계의 공공의 가치로 끌어 올리는 재조명의 작업을 시급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김수근 건축에 대한 연구나 자료수집이 수필이나 전기의 수준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그의 건축이 제대로 된 역사로 남길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심포지엄 중에 본인은 커다란 의문이 떠올랐다. 한국의 근대 건축사를 보면 박길룡을 선두로 김중업, 이희태, 김수근 같은 기라성 같은 건축가들이 있는데 과연 당시 그들이 공유했던 가치는 없었을까? 아니면 이제라도 그들의 작업에서 추출할 수 있는 공통적 가치는 없는 것일까? 그 시대의 건축과 상황의 재조명을 통해 우리들이 해답을 찾아야 할 숙제이다.

내년 2017년에는 국제적인 건축행사인 국제건축연맹(UIA, Union Internationales des Architectes)의 세계건축대회가 서울에서 열린다. 동시에 제1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도 열린다. 국제적으로 우리의 건축을 알릴 좋은 기회이다. 이외에도 지금 한국 건축계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중인 것으로 안다. 우리는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2011년 동경 UIA와 함께 기획된 전시 및 심포지엄 《메타볼리즘: 미래의 도시(Metabolism: The City of the Future)》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1년 이미 일본의 건축은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상황이어서 보여줄 만한 콘텐츠가 충분했을 텐데, 그들은 왜 50년 전의 메타볼리즘이라는 사건에 주목했을까? 전시와 동시에 기획된 심포지엄의 내용을 보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 No.1 메타볼리즘에서의 메타볼리스트
  • No.2 정치로서의 메타볼리즘
  • No.3 메타볼리즘의 DNA: 소셜 시스템
  • No.4 메타볼리즘의 DNA: 건축가의 역할
  • No.5 공간에서 환경으로: 동시대 매개활동 사례와 오사카엑스포

첫 번째 심포지엄에서는 1960년대 메타볼리즘 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두 번째에서는 메타볼리즘의 정치적 또는 정책적 의미를 짚어보고 있는데 건축가 렘 콜하스가 발제자로 참여했다. 세 번째에서는 ‘건축가가 어떻게 사회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메타볼리즘을 재조명하고 소셜 시스템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소개하였다. 네 번째에서는 메타볼리즘의 유전자를 가진 젊은 건축가들이 새로운 시대와 상황에서 어떠한 역할과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발표하였다. 마지막 심포지엄에서는 과거의 메타볼리즘이 추구했던 생각과 가치에서 어떻게 하면 현재 시대와 상황에 맞는 새로운 정신을 끌어낼 수 있는가를 두고 분야별로 입체적인 토론이 벌어졌다. 종합적으로 보면 일본의 근대건축을 다시 들여다보고 그 정신과 가치를 재평가해서, 지금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들의 작업 속에서 그 유전자를 확인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끌어내려는 노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우리 근대건축에 대한 자료를 찾고 공부하면서, 선배 건축가들이 그 당시 주어진 상황에서 펼쳐 놓은 건축과 도시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실현되지 못한 프로젝트를 관심 있게 찾아보았는데 그러한 이유는 위대한 생각들은 실현되지 못한 프로젝트에 훨씬 더 많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들은 접근이 쉽지 않거나 아주 날것 그대로인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이제는 우리 근대건축을 재조명하여 선배 건축가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건축과 도시를 위한 생각과 제안들을 공공의 가치로 재평가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사실 많이 늦었다. 내년 세계건축대회까지 이제 1년 남짓 남았다. 우리의 근대건축을 재조명하기에 1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촉박하지만 집중해서 작업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면 재조명 작업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로드맵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에서 과거가 없다면, 현재도 미래도 존재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우리 근대건축의 재조명을 통해 우리의 잊혀진 과거를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열어 가야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임재용

㈜건축사사무소 OCA 대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미시건대학교에서 건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 미국 LA에서 O.C.A를 개소하여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96년 귀국하여 건축사사무소 OCA 개소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임재용은 사회, 경제, 문화 전반의 상황 변화를 인식하고 재해석하여, 건축과 도시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축가이다. 2015년 ARCASIA Awards Gold Metal 수상 및 건축문화대상, 건축가협회상, 서울시건축상 등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으며, 현재 새건축사협의회 회장을 맡아 건강한 건축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근대건축가 재조명의 이유

분량5,373자 / 10분

발행일2016년 7월 31일

유형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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