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화와 울화
김신식
분량4,598자 / 10분
발행일2016년 11월 14일
유형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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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최근 문예지의 혁신에 대해 쓰기로 했다. 참고로 나는 지난해 언론을 통해 문예지의 혁신을 도맡을 사람으로 지목된 한 명이다. 한데, 나는 써봤자 구려질 것이 뻔한 이 주제에 대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고심하다가 혁신을 내건 문예지 혹은 비평지를 접한 독자들이 알아두면 괜찮겠다 싶은 이야기가 있어 단장의 형식을 갖추어본다.
1 학자
학자들은 그 누구보다 잡지를 잘 안다고 믿는다. 오늘도 SNS를 즐겨 하는 학자들은 (새) 잡지에 대해 화를 내거나 쉬이 품평하길 좋아한다. 이들은 대체로 편집자 출신의 잡지장이들이 선보이는 감각을 불신한다.
2 생활자
내가 생활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농구로 치자면 길거리농구에서 출발해 농구선수가 된 경우다. 이들은 산전수전 겪은 일화를 자부심으로 삼고 잡지 일에 매진한다. 생활자형 잡지장이들은 대체로 학자의 안목이 후지다고 생각한다.
3 잡지연구자
나는 잡지의 사회문화사를 연구하는 (국)문학자들의 자신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지적(질)도.
4 살림꾼
비평지의 세계에서 살림꾼이란 표현은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어느 비평지를 만드는 모임(이하 비평모임)에서 살림을 도맡거나, ‘행정가’ 역할을 맡게 된다면, 구성원들은 암묵적으로 당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너의 글은 그리 예리하지 못해. 성실함을 맡아주렴.’
5 성품 교환원
‘살림꾼’ 이야기를 더 해보자면, 비평모임에서 살림꾼으로 지목된 이는 모임 내 구성원 간의 마찰을 줄여주는 ‘성품 교환원’이 되어야 한다.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챙기고, 각자의 성품을 챙기는. 모임 안에서 마찰음이 심한 일이 생길 때, 성품 교환원은 평소 자신이 관찰해온 구성원 개인의 성품을 표현해주며, 다독인다. 역시 마냥 좋은 역할만은 아니다.
6 폐허 애호
윤원화가 자신의 미술비평집에서 쓴 표현이다. 나는 이것이 한국 문학장과 문예지의 변화를 둘러싼 음산한 기운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녀의 분석처럼 서울이 맑고 매력 있는 세계 도시가 되려고 애써왔을 때 바로 이런 노력으로 인해 서울에선 2000년대 후반부터 대량의 폐허가 양산되었다. 이때 “폐허는 응당 읽을 수 없기에 누구도 크게 괴롭히지 않는 아련한 공허로, 그저 어디서 본 것 같은 또 하나의 권태로운 스타일로 무기력하게 재생산된다.”1 문학하는 이들이 혁신을 추구하는 것은 혁신에 대한 애착보단 그 혁신을 추동하는 폐허 자체를 더 끌려 하기 때문은 아닐까. 문학의 혁신가들은 홍수가 정작 나지 않아서 실망해 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자들일지 모른다. 이들은 혁신을 통해 외려 재난이 휩쓸고 생겨난 폐허를 감상하고 싶은 건지도.
7 문학평론가
당신이 지적 섭식력이 어마어마한 이들을 찾는다면, 문학평론가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늘 문학의 위기와 마주해왔던 그들은 고장 난 문학을 수리하고자 외부의 다종다양한 지식과 힘을 빌려와 문학적 담론으로 전유해왔다. 일시적인 찬사를 받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그리고 다시 외부를 기웃거린다. 또 찬사를 받는다. 또 오래가진 못한다.
8 방어적 비관주의
그리하여 문학평론가들이야말로 온갖 시도와 실험에 대해 착잡한 자들이다. 제대로 성공한 경험이 없으니, 이들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적 비관주의자’가 되어버린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이 작품, 이 잡지 상당히 실험적인데’ 하는 반응에 대해 ‘저는 문학적 실험이 뭔지도, 그게 유효한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마음을 동여매는 것이다.
9 편집위원
지난해 문예지의 혁신과 편집위원 세대교체란 타이틀로 묶여 소개되었을 때, 한 트위터리안이 새로이 영입된 편집위원들을 평가하며 명망값을 얻으려는 이들이라고 언급했다. 그분께 죄송하지만, 그러기엔 지금껏 내가 얻은 실질적·심리적 이윤은 거의 없다. 나는 단지 소액의 활동비를 받고 무언가를 바꾸자는 일의 항목을 따르는 사람일 뿐이지, 과거처럼 무언가를 다 내걸고 헌신하는 사람은 아니다. 만약 내게 누군가 헌신과 애착, 진정성을 요구한다면 금세 떠났을 것이다. 나는 편집위원이 아니라, 생활인이다. ‘직업인’이라고 근사하게 말하면 좋겠지만, 나는 당장 내일도 불안하다.
10 문학생산자 = 문학소비자
강정석의 「서울의 인스턴스 던전들」을 읽었다. 오늘날 무수히 쏟아지고 있는 예술 장 안에서의 신생공간은 강정석이 보기에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요즘은 어딜 가나 미술생산자가 미술소비자라는 점. “전시를 하면 미술생산자가 찾아오고, 한 번 와본 사람들이 또 방문하고”2 하는 그런. 미술 대신 문학을 넣어도 낯설지 않다. 문예지의 혁신도 마찬가지 아닐까.
11 조효원
지난해 그를 합정의 한 맥줏집에서 만났다. 그는 물었다. “신식 씨는 독자가 과연 있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답했다. “글쎄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시간이 흘렀다. 그의 질문과 의문이 이제야 조금씩 스며든다. 독자는 있다. 근데 없기도 하다.
12 라이선스의 정치
안타깝고 구리지만, 여전히 문예지의 혁신에는 ‘라이선스의 정치’가 작동 중이다. 아마 어느 문예지의 편집위원이 된다는 것에 ‘명성’이라는 렌즈를 갖다 대고 싶은 분들은 이것에 대한 착시가 있기 때문일지도. 보통 한 문예지의 편집위원이라고 하면 결국, 학자-교수를 목표로 한 지성인을 가리킨다. 학문장 안에서 발급되는 라이선스는 문예지의 공신력으로 자연스레 인준된다. 소위 ‘젊은’ 세대는 여기로부터 자유로우리라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프리미엄과 등급 나누기는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13 금정연
문예지의 혁신에 여전히 내장된 라이선스의 정치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금정연이 쓴 「순-문학적으로 살아남기」3를 일독하길 권한다.
14 팔짱
금정연이 『문학과사회』 2016년 여름호에 쓴 표현이다. 그는 문학과지성사가 발간하는 문예지 『문학과사회』의 혁신호가 한 계절 늦게 나오게 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궁금증을 안고 기다렸던 독자 여러분과 어떻게 만들지 팔짱을 끼고 기다렸을 관계자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4 다시 한 번. 문학생산자=문학소비자.
15 자음과모음
이 글을 쓰기 이전에 내게 문예지의 혁신을 평해달라고 청탁했던 곳이다. 다시 들추어보니, 혁신이 연극이라고 썼었다. 오 마이 갓 (끄덕끄덕).
16 페리 앤더슨
최근에 페리 앤더슨이 쓴 『런던리뷰오브북스』 서평을 다시 읽었다. 그가 생각하는 잡지관은 이러하다. “아마 전반적인 분위기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잡지가 사르트르적인 의미에서 진지한 정신의 어떤 낌새에도 저항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있는 척하고, 거만하며, 위선적인 정신 말이다. 이 모든 것에 맞서 이 잡지가 가진 놀기 좋아하는 태도는 가장 작은 주제에서도, 가장 큰 주제에서도 잘 볼 수 있다.”5 아멘. 다만 한국에선 요원하다.
17 이청준
이청준의 「소문의 벽」을 통해 그의 잡지 편집(자)론을 엿볼 수 있다. “필자(또는 작가)는 그 진술이 소설이라든가 하는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는 데 비해, 잡지편집자는 자기의 잡지 속에서 그 의도를 이차적으로 실현하게 된다는 점, 그리고 잡지편집자에게는 자기진술을 실현하기 위해 필자들을 동원하고 그 필자에게 일차적인 진술을 요구할 권리가 부여되고 있다는 점에서 처지가 조금씩 다르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된 필자와 편집자의 진술이 결국 잡지라는 한 권의 책 속에서 서로 의좋게 만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방법이라는 것도 별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6
부연: 잡지를 만들 때 편집자 출신의 잡지장이는 필자를 통한 자기진술에 적극적이지만, 학자 출신의 잡지장이는 대개 필자를 믿고 내버려 두는 편이다. 어느 게 더 맞는지, 더 좋은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후자의 경우가 잡지를 망치는 걸 많이 봐왔다.
18 단속과 단결
문예지를 만드는 모임과 구성원들이 있다. 이들은 각자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소식통을 맡은 이들은 상대방의 형세를 파악하고 (비)웃거나 초조해한다. ‘우애와 공동체’란 좋은 표현도 있지만, 그러기엔 우린 먹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차라리 단속과 단결이라고 칭하자. 어색한 조합이지만, ‘비즈니스 프렌드십’이 썩 나쁘다고 보진 않는다. 이 관점을 두고 ‘쟤네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 하는 당신이 이상하다.
19 잡지라는 이름의 광기
잡지를 만드는 모임 생활을 한 지 햇수로 9년째다. 지금 이 순간도 잡지는 망하고 생기지만, 일관된 의문은 계속 품고 산다. 잡지라는 이름의 광기는 대체 무엇일까.
20 혁신
어느 문예지의 새 디자인을 맡은 분이 말했다. ‘혁신호’라는 명칭이 부담스럽다고. 그는 대신 ‘리뉴얼’을 한다고 말했다. 다들 혁신에 취해 있을 때, 그 디자이너는 계속해서 요구했다. 왜 바꿔야 하는지 납득시켜달라고. 이것저것 바꿈의 미래상을 제시했을 때, 그는 지키고 싶은 것은 지키고 싶다 했다. 정리정돈만 해줘도 나름의 변화라고 이야기했다. 솔직히 처음엔 혁신의 부적합자인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이 달라졌다. 다들 혁신의 상을 ‘내지르는 디자인’으로 표방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그는 ‘고요의 디자인’을 택했다. 혁신은 뒤바꿈의 차원이 아닐지 모른다. 정리정돈. 이것만 하기에도 벅차다. 문학장은 그런 곳 같다.
김신식
198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2008년 『당비의 생각』(舊 『당대비평』)을 통해 비평, 출판활동을 시작했다. 1인 사회과학출판연구소 ‘김샥샥 연구소’를 차려 학문제도권 바깥에서의 감정사회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일민미술관에서 아카이브 전시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를 공동 기획했다.
비화와 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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