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의 찬가: 낭만으로 인한 비극과 유산
정인하
분량5,248자 / 10분 / 도판 2장
발행일2014년 9월 30일
유형해설
1984년에 발행된 『김중업,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열화당)를 읽다 보면, 이 책은 그의 말대로 건축 작품집이라기보다는 ‘일그러진 자화상’이란 느낌이 든다. 거기에는 김중업의 주요 작품뿐만 아니라, 설계에 관한 에세이들, 일생에 잊을 수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를 기리는 다른 예술가들의 글들이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평생 자기 세계를 온전히 구현하기 위해 매진했던 한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더욱이 이 책이 출판되던 때에 그의 삶은 치명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다. 1983년부터 악화하기 시작한 건강은 1984년 <예술의 전당> 현상설계를 계기로 쓰러지면서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나빠졌다. 건축가는 이 책을 준비하면서 다가올 죽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전 생애를 바쳐 만든 지표상의 흔적들을 이 책을 통해 마지막으로 정리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편의 글들은 기존에 발표한 것들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일관된 주제나 내용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우리 건축이 나아가야 할 길’을 이야기하다가도,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멋을 가르쳐주신 어머니’를 회상한다. 한편으로 ‘표정이 있는 집’을 이야기하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환은행본점>과 같은 ‘오피스빌딩’을 제안한다. 이처럼 건축가 김중업의 생각은 매우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들 심층에는 면면히 흐르는 낭만성을 확인할 수 있다. 김중업은 그것을 통해 파편처럼 흩어진 글들을 하나의 바구니 속으로 주워담고 있다. 사실 그런 낭만성은 김중업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것 때문에 그는 항상 외로웠고, 또 큰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거기서 솟아나는 생명력은 그의 건축을 독특한 경지로 끌어올렸다. 정치권력에 쫓겨 외국으로 도피하면서도, 그는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거역의 불길을 가둘 수 없었다. 오늘날 건축이 거대한 자본의 흐름 속으로 와해되면서 더 이상 송곳만큼의 허튼 생각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에서, 김중업의 낭만은 까마득한 시기의 신화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낭만적 세계를 끝까지 실현하려 최선을 다했다. 낭만이 초래할 비극적인 결말을 예감하면서도, 그는 마지막까지 그것을 부둥켜안고 갔다.
김중업이 유년 시절에 대해 쓴 글을 보면, 그의 낭만적 기질은 선천적인 것으로 보인다. 김중업은 어릴 적 성천에서의 삶을 회상하면서, 그곳에서의 기억이 마치 잘 짜인 서사시와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치 꿈꾸듯 주변 풍경을 술회한다. “당시 여름 안개는 양털처럼 펼쳐졌고, 그때 읍내는 하얀 바다와 같았으며, 군데군데 나무들은 바다의 암초들처럼 보였다.” 이런 대목은 그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풍경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그런 기질은 이어지는 교육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길러졌다. 평양의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야수파 그림을 그렸고, 보들레르와 랭보의 시에 미쳐 난해한 시작詩作을 시도했다. 결정적으로 김중업이 건축을 전공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의사, 변호사가 되기를 원한 그의 부모와, 그를 사랑했던 고등학교 미술교사의 의사가 절충된 결과였다. 그렇게 해서 청운의 꿈을 안고 찾아간 요코하마 고공에서도 그를 가르쳤던 선생은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 출신이었고, 훗날 파리에서 만난 르 코르뷔지에도 그의 낭만적 기질을 자극했다.
김중업의 낭만적 기질은 시대적 고통과 결합하면서 매우 독특한 페이소스를 만들어냈다. 특히 그가 막 사회활동을 할 시기에 터진 한국 전쟁은 실존적인 모든 것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았다. 당시 부산으로 피난 갔던 김중업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했고, 그들과의 만남은 독특한 정서적인 연대감을 만들어냈다. 사실 김중업 세대는 식민지배와 해방, 내전 그리고 냉전과 고도성장기를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일찍부터 처절함을 경험했다. 그 시기는 한국사에서 가장 굴곡진 시기였고, 예술가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1951년 김중업이 부산에서 화가 이중섭을 만났을 때, 이중섭은 방금 처자를 일본으로 떠나보낸 직후였고, 절친한 불문학자 전봉래가 스타다방에서 자살한 때라서 매우 어수선했다. 서로 만나면 어떻게 살아남는가가 문제였다. 김중업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기억은, 이중섭에게 일본에 있는 처자와 어렵게 전화 연결을 주선해 주었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양식 있는 예술가가 겪어야만 했던 시대적 아픔에 대한 연민이었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중업은 다른 한편으로 서구 문화에 대한 강렬한 동경을 키워 나갔다. 공초 오상순과 만나면 릴케와 발레리에 대한 숱한 이야기들이 오갔고, 늘상 파리에 묻힌 쇼팽이며 보들레르에 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김중업이 나중에 파리에 머물 당시 남프랑스에 있는 세트Sète를 찾아간 것도 오상순이 이야기한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동경은 서구 근대건축을 직접 접해 보려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당시 비슷한 전례가 전혀 없었던 상황에서 그것은 엄청난 도전을 의미했다. 1952년 9월 김중업은 마침내 그 기회를 잡게 된다. 베니스에서 개최된 세계예술가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면서 르 코르뷔지에를 만났고, 그를 졸라서 그의 사무실에서 3년 반을 일하게 된다. 그것은 서구건축의 최첨단 흐름에 직접 뛰어들려는 김중업의 의지 때문에 가능했지만, 그런 의지의 이면에는 내면에서 키워온 서구 문화를 향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을 통해 김중업은 온갖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에 몰두해 나갔다.
오랫동안 김중업과 함께 작업했던 안병의는 김중업이 <주한 프랑스 대사관>의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아이디어를 다듬고 또 다듬어서 스케치만 약 1,000여 장을 넘겼다고 한다.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도, 계속해서 샘솟는 아이디어를 시공에 반영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3차원적인 곡면 지붕을 당시 시공기술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충을 겪었음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고, 이어 <서산부인과 병원>과 <제주대학교 본관>에서도 더욱 복잡한 형태를 시도한다. 그들의 시공을 위해 곡면 부위를 일일이 모눈종이에 그려놓고, 거기에 맞춰 거푸집을 만들도록 요구했다. 이런 요구는 당연히 현장의 반발을 불러왔고, 건축주에게도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지만, 건축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이성적으로 볼 때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김중업은 그냥 묵묵히 밀고 나갔다.


이런 험난한 과정을 밟으면서, 끝까지 밀어붙인 것은 꿈과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중업은 공업화에 의해 해체된 낭만적 전통을 되살리고자 했다. 그래서 김중업은 건축을 “인간에의 찬가”라고 썼다. 그리고 위대한 건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흔적을 지표상에 남기려는 뜨거운 열망”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의지는 그의 작품에서 명확히 드러나며, 그의 건축은 한국 건축이라는 지역적 한계와 근대 혹은 탈근대라는 시대적 경계에 매몰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의미가 환기되는 본원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1956년 귀국 이후, 김중업은 수준 높은 작품들을 설계하며 한국 근현대 건축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좌절을 겪게 된다. 특히 도시문제를 둘러싼 정부 정책에 대한 절망은 곧 분노로 표출되었다. 그 결과 1971년 11월 김중업은 3개월 여권으로 프랑스로 추방당했다. 형식은 자진 출국이었으나 당시 군사정권에 의한 거의 반강제적인 것이었다. 그가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1971년 8월 10일에 발생한 ‘광주廣州 대단지 사건’ 때문이었다. 김중업이 광주단지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되었다. 이곳 근처에 그의 부모 산소가 있었고, 그곳에 가려면 광주단지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이곳 실상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광주대단지 사건이 터지자 언론을 통해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전에도 그는 이미 와우아파트 붕괴, 도둑촌 사건, 그리고 도심 고가도로 건설계획도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어서 이것은 돌출된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철거민들과 사전에 조직적인 연계를 갖고 있지는 않았고, 그가 취한 행동은 지식인의 양심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지만 폭동이 일어나자마자 그는 수사기관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감옥을 갈 것인지 아니면 해외로 나갈 것인지 선택을 하라고 강요받는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해외로의 추방을 선택하게 된다. 정부의 급속한 근대화 정책으로 말미암아 인간 환경이 급속도로 파괴되어 나갈 때, 모든 사람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그의 낭만적 충동은 그런 비정상적인 것을 그냥 못 지나치게 만들었다.
1978년 귀국에서 후 김중업은 다시 작품활동에 몰두하지만, 1984년 쓰러지면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그는 집안에 칩거하면서 정상적인 외부활동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작품설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그의 후기작품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 신중함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전까지 거의 모든 작품의 설계가 김중업 자신이 해 준 스케치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이 시기부터는 거의 모든 초기단계의 설계가 실무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후, 김중업이 여기에 몇 가지 손을 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1980년대 중반의 작품들에서 그의 건축언어는 나타나고 있지만 더 이상 그의 작품의지가 담겨 있는 깊고 큰 맛이 잘 느껴지지 않고, 또 강렬한 조형언어의 구사도 많이 희석되어 보인다. 김중업 건축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은 건축가의 내면에 불타오르는 생명력을 건축적 형태에 부여하여, 거기서 터져 나오는 웅혼한 울림을 만들어 냈기 때문인데, 시간이라는 무지막지한 괴물은 그의 내부에서 격렬하게 요동치는 이 에너지를 점차 빼앗아 버렸고, 그의 건축은 내적인 생명력이 거세된 껍데기로만 남게 된 것이다.
사실 건축사 속에서 등장하는 용어 가운데 낭만주의만큼 이해하기 힘든 것도 없다. 정확한 실체를 집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낭만주의는 정교하게 구축된 도시문명보다는 거친 자연을, 인간의 합리적 이성보다는 예술적 감성을, 현실적 이해관계보다는 상상이나 환상적 분위기를, 그리고 집단적인 이념보다는 개인의 느낌을 중시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김중업은 안토니오 가우디, 르 코르뷔지에, 알바 알토로 이어져 온 근대 낭만주의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그의 건축 작품들은 꿈과 동경, 연민과 회한, 분노와 좌절 그리고 샘솟는 영감과 열정을 담고 있으며, 그래서 현실적인 지평을 넘어 큰 잠재성을 갖고 있다.
정인하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 제1대학에서 프랑스 현대건축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현재까지 한양대학교(에리카)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아시아 근현대 건축과 도시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인간에의 찬가: 낭만으로 인한 비극과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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