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포먼스, 몸과 시간과 제도를 질문하다
김해주 × 이경희
분량14,116자 / 30분 / 도판 3장
발행일2016년 11월 14일
유형인터뷰
지난여름, 네 편의 영상과 세 편의 퍼포먼스로 구성된 «무빙/이미지»가 문래예술공장에서 열렸다. 1층의 블랙박스와 위층의 박스시어터를 오가며 작품을 관람하고 퍼포먼스에 직간접 참여한 관객들의 모습은, 다소 건조한 전시 제목과는 다른 긴장과 온도를 띄었다. 밀도 있는 구성으로 그간 움츠린 퍼포먼스 페스티벌 중에 짧지만 유쾌한 프로젝트였다. 선별한 작품들에는 시간의 미학과 안무에 잠재된 사회성, 그리고 시각 이외의 감각과 신체성에 대한 이슈가 잘 안배되어 있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퍼포먼스 분석을 시도한 김해주 큐레이터를 만나 움직임 속 이미지 읽기를 들어본다.
김해주 독립 큐레이터이자 다양한 매체에 전시와 작가, 퍼포먼스에 대한 글을 쓰는 필자이다. «무빙/이미지»(문래예술공장, 2016), «안무사회»(백남준아트센터, 2015), «결정적 순간들: 공간사랑, 아카이브, 퍼포먼스»(국립현대무용단, 아르코예술자료원 2014), «메모리얼 파크»(팔레드도쿄, 2013) 등의 전시 및 퍼포먼스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인터뷰어 이경희
인터뷰 일자 2016년 9월 28일
무빙/이미지와 아카이빙
이경희 올해 김해주 큐레이터가 문래예술공장에서 진행한 «무빙/이미지»(2016.7.15.-7.31)는 동시대 아트신이 과제로 안은 많은 부분을 함축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다원’이라 일컬어지는 퍼포먼스 아트, 매체 복합성, 독립 큐레이팅이기에 불가피한 기금에의 의지, 작품과 홍보이미지의 내밀한 개연성, 효과적인 공간 디자인, 퍼포먼스와 전시의 병행 등 말이죠. 이러한 지점들이 꽤 잘 드러났기에 궁금증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리플렛에는 이 견고한 프로젝트에 대한 취지나 문제제기는 생략하고 개별 작품 소개만 했어요. 이유가 있나요?

김해주 ‘무빙/이미지moving/image’는 퍼포먼스를 움직이는 이미지로 생각해보려는 기획이었어요. 실시간live으로 진행되는 퍼포먼스도 무수히 많은 이미지의 연결로 보게 되는 지점이 있거든요. 특히 동시대의 퍼포먼스가 자주 사용하는 방식 중 하나가 ‘느림’인데 그 느림 속에서 동작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마치 프레임의 연속 같기도 해요. 실제로 안무가인 마리아 하사비의 매우 느린 퍼포먼스를 보면 조각과 무용의 사이에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이 기획은 ‘영상을 이미지 단위로 분석하는 것처럼 퍼포먼스도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어요. 움직임 안에서 이미지를 읽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굳이 기획의 주제로 작업을 묶은 것은 퍼포먼스가 많은 경우 분석과 고찰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이벤트로 소모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어요.
«무빙/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로서의 퍼포먼스와 신체 움직임을 담고 있는 영상을 같이 보여주기 위해 세 개의 퍼포먼스를 3주간 주말마다 프로그램하고 영상 작업들을 묶어 전시로 기획했어요. ‘무빙이미지’라는 것이 영상을 의미하기도 하니 그와 구분하기 위해, 그리고 움직임을 분절한다는 의미에서 제목 가운데에 ‘슬래시( / )’를 넣었고요. 그리고 기획의도를 밝히지 않은 것은, 제게는 움직임에서 이미지를 읽는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어서, 이것이 어떤 주문이나 강요의 언어로 들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작업을 대하면서 읽거나 경험하면 좋겠다고 바랐기 때문이에요.
이경희 주변의 프로젝트들을 보다 보면 ‘기금 없이 현대미술이라는 게 작동을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심지어 문화예술로의 국가 지원이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높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아티스트피나 기획자 인건비는 인식도 여전히 낮고 추진 기간도 너무 짧아요. 결국 아티스트, 디자이너, 설치 등 협업하는 모든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하며 진행해야 하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거예요. 아카이빙 작업도 하셨는데 프로젝트 중 1년 이상 하신 게 있나요?
김해주 물론 기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요. 기금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고, 프로젝트에 대한 규모는 거기에만 맞출 수는 없으니 일을 하면 할수록 적자가 되는 상황은 있어요. 당연히 지속성에 대한 고민이 생기는 것 같아요.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 충분한 작업의 조건을 만들어 드리지 못한다는 것도 미안한 일이고요. 기금의 시간표에 맞춰 일정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도 자율성을 떨어뜨리게 되고요. 독립적으로 일하지만 1년 이상 한 프로젝트가 없는 건 아니에요. 작년 아시아문화전당이 문을 열기 전까지 당시 아시아문화정보원의 공연예술아카이브를 외부에서 책임연구원으로 맡아 1년 반 정도 했어요. 비교적 긴 일정이었지만 공연예술 아카이브라는 전체 우산이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주제였어요. 아카이브 관련 리서치 뿐 아니라 자료 수집도 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로 좁혀서, 한국의 소극장 운동, ‘안그라’라 불리는 일본의 언더그라운드 연극 운동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인터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이경희 인터뷰를 준비하며 쉽지 않았던 것이 관련 작업들이 퍼포먼스이다 보니 유튜브 등에 의지해야 했는데, 자료들이 온전한 것도 아니고 상당수는 일반인이 찍은 것이었거든요. 퍼포먼스 아카이브에 대해서는 과연 그것이 타당 혹은 가능한가부터 시작해 여러 담론이 많을 것 같아요.
김해주 모두가 자료를 모으는 게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잘 하지 않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카이빙을 할지 정하는 것도 쉽지 않고요. 그리고 아카이브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료를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유를 하기 위한 거잖아요. 공유 플랫폼이 없으면 개인이 아무리 아카이브를 해도 공유가 어려워요.
개인적으로 아카이브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2006년에 프랑스에서 1년간 큐레이터 트레이닝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면서였어요. 당시 주제가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의 아카이브 리서치와 관련한 것이었어요. 그때 ‘아카이브란 무엇인가’, ‘아카이브를 어떻게 작업의 방법론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 ‘전시 기획을 어떻게 아카이브의 구성을 통해 읽을 것인가’를 접하게 되었죠. 아카이브라는 공간 그리고 아카이브와 작업 간의 연결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경험이었어요. 제가 아카이브에 대해 가지는 관심은 이 두 가지 갈래로 나뉘어요. 하나는 일종의 ‘제도로서의 아카이브’, 즉 자료를 수합하는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아카이브라는 개념’을 가지고 만드는 작업들이에요. «결정적 순간들: 공간사랑, 아카이브, 퍼포먼스»에서 이 두 가지를 실행해 봤어요. 2014년 국립현대무용단이 한국 현대무용의 시작과 전개를 돌아보는 일환으로 과거 공간사옥 아래의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가졌던 ‘현대무용의 밤’을 주목했어요. 80년부터 매월 정기적으로 열렸던 무용발표회로 다양한 신진 안무가들이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그곳에서 작품을 발표했던 분들이 지금 현대무용계의 중심을 잡고 계시죠. 국립현대무용단으로부터 전시 기획 제안을 받은 후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공간사랑’이라는 곳이 매우 복합적인 장소였어요. 1977년부터 90년대 초까지 십여 년을 활발하게 활동하는 동안 약 천여 건의 공연이 있었고 실험음악, 인형극, 현대무용, 전통무용, 굿, 사물놀이, 공옥진 선생의 창무극 등 모든 것이 뒤섞인 엄청난 곳이었던 거죠. 문제는 착수하고 보니 그곳에 대한 아카이브가 없는 거예요. 무용평론하셨던 고 김영태 선생님께서 예술자료원에 기증하신 리플렛 일부와 김수근문화재단의 사진들 정도였어요. 전시준비를 위해 강준혁, 강영걸 선생님 등 그곳의 기획과 운영을 맡으신 분들의 인터뷰를 진행했고 연보와 리플렛을 보면서 ‘공간사랑‘에 참여하신 분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자료를 빌렸어요. 전체를 다 보여주는 아카이브 전시라기보다는 연극, 전통 공연, 무용, 마임, 음악 등 다양한 흐름을 분류해서 소개하는 정도의 작업이었어요. 여기서 연구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1차 자료가 있는 제도로서의 아카이브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렇게 직접 자료를 수집하는 일종의 ‘아카이빙’ 작업을 했지만, 사실 제가 더 관심을 갖고 있었던 부분은 ‘퍼포먼스에서 과연 아카이빙이 가능할까’ 하는 것이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일회적이고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퍼포먼스는 기록으로 경험을 온전히 전달하기 어렵죠. “퍼포먼스의 존재가치는 오직 현재에 있다. 퍼포먼스는 저장,기록,문서화되거나,순환구조 그리고 이에 파생되는 경제구조에 동참할 수도 없다”2는 페기 펠란의 글 역시 빠지지 않는 레토릭이고요. 퍼포먼스를 온전히 기록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한 논의가 있는 한편, 일반적인 방식으로 아카이빙 하기보다는 퍼포먼스를 기억한다는 것 자체를 작업으로 옮기는 시도들이 있어요. 퍼포먼스의 재연reenactment도 그 한 예시가 될 수 있고요. 관련해서 제게 중요했던 경험은 남화연 작가의 ‹이태리의정원›(페스티벌 봄, 2012)에 드라마트루그로 참여한 것이었어요. 당시 작가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퍼포먼스는 사라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은 다시 복원할 수 없는데, 아카이브에서 나오는 자료(사진, 영상 등)는 원경험을 복원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퍼포먼스 아카이브는 어떤 대안 형태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들을 했어요. 그 공연은 퍼포먼스로 아카이브를 만드는 것, 즉 ‘아카이브로서의 퍼포먼스’였던 거예요. 전설만 있을 뿐 실제 자료가 많지 않은 무용가 최승희를 통해서 그의 개인사를 풀기보다는 불가능한 아카이브에 대해서 얘기하는 시도였어요.
이경희 공연예술이나 퍼포먼스 관련해서는 예술의전당과 대학로에 관련 아카이브가 있지 않나요?
김해주 네, 대학로와 예술의 전당에 아르코예술자료원이 있어요. 하지만 현재 열리고 있는 작업의 수나 진행되는 일들에 비하면 아카이빙의 속도는 매우 느린 것 같아요. 만약 나중에 누군가 2000년대 퍼포먼스를 공부하려 한다면 제가 ‘공간사랑’의 자료를 수집할 때처럼 고생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엄밀한 의미의 아카이브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현재 일어나는 퍼포먼스들을 목록화하는 웹사이트나 시스템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나 요즘은 SNS를 활용하는 추세여서 공연 정보가 타임라인과 함께 흘러가 버려요.
퍼포먼스 고유의 언어
이경희 다시 «무빙/이미지»로 돌아와서, 의도하셨던 ‘퍼포먼스를 만드는 구조로서의 이미지’, ‘퍼포먼스를 해석하는 방식으로서의 이미지’, ‘퍼포먼스를 해석하는 이미지’가 각각의 작업과 어떻게 연관 있는지 궁금해요.
김해주 오민 작가의 퍼포먼스는 말씀하신 ‘퍼포먼스를 만드는 구조로서의 이미지’가 가장 잘 보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박아람 작가의 퍼포먼스는 마치 “머릿속에 소프트웨어를 가동하듯” 극장 공간에 이미지를 상상해보는 작업이에요. 박민희 작가는 관람자와의 관계 및 소리의 공간감을 재편하는 작업을 보여주었고요. 신체 움직임이 등장하는 영상들 중 줄리앙 프레비유는 새로운 기술과 동작의 관계를 수집하여 몸의 재현으로 보여주고요. 마농 드 보어는 필름 매체를 기반으로 잔상으로서의 춤의 움직임을 구현합니다. 그라체 슈빈트나 마리 쿨 파비오 발두치의 영상 작업은 이미지를 축적해서 만드는 퍼포먼스 영상을 각각 긴 호흡과 단숨으로 보여주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시각예술 작가의 퍼포먼스는 시간 안에 그림을 그려 쌓는 방식으로 작업을 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연극이 서사에 기대어 흐름을 만들거나 그 흐름이 잘 드러나게 장면을 구축한다면, 시각예술 작가들은 서사 개연성이 조금 떨어지거나 비껴가더라도 이미지의 연결로써 작업을 만들어가요. «무빙/이미지»에서는 시각예술에서 퍼포먼스를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드러내고 싶었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작가들이 전시, 퍼포먼스, 영상을 다양하게 다룰 수 있다는 점이에요. 저는 퍼포먼스가 한 작가가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매체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물론 극장을 사용할 때 새로 기술적인 부분을 익히기도 해야겠지만 완전 다른 영역은 아니라는 거죠. 만약 극장과 전시장이 같이 있는 공간이라면, 한 작가의 넓은 스펙트럼을 퍼포먼스와 전시로 같이 보여줄 수도 있는 거죠. 기 드 쿠앙테는 조각, 디자인, 교육, 전시, 희곡 쓰기를 했고 희곡 무대를 직접 만들어 연출도 했어요. 이분의 전시와 퍼포먼스를 동시에 볼 기회가 있었는데, 한 작가의 세계를 훨씬 넓게 이해할 수 있고 그의 조형언어가 다른 각기 다른 매체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보는 것이 흥미로웠어요.
이경희 말씀하신 것처럼 «무빙/이미지»에서 전시와 퍼포먼스가 같은 무게로 평행하게 동시 진행된다는 것을 프로젝트 기간 중반부에 인식하고서야, 제가 아직도 퍼포먼스를 메인 전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도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 봄’, 그리고 최근의 국립현대무용단의 ‘다원예술프로젝트’를 거치며 이제는 영역의 확장이 확실히 자연스러워진 것 같아요.
김해주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표현 방식이 그 매체를 활용했을 때 흥미로울 수 있으면 충분히 시도할 수 있도록 접근 가능성이 열려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상과 퍼포먼스는 둘 다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 영상작업을 하던 분들은 또한 퍼포먼스에 쉽게 연결되기도 해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현대무용단이 3개월에 걸쳐 소개한 ‘다원예술프로젝트’를 보면 특히 안무가들은 미술관 공간 안에서의 관객과의 관계, 공간의 다양한 활용방식을 실험하는 데 관심이 큰 것 같았어요. 이런 작업들에서 관람자도 작업자만큼 흥미로운 질문으로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전시 공간에서의 퍼포먼스가 관람객에게 다른 형식의 몸의 등장으로 내 몸을 고찰하게 하거나 관람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하기보다, 관람의 동선 안에 뭔가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정도로 인지되는 상황을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공간교차의 차원을 넘어서요.
사회적 안무, 공동의 몸
이경희 몸과 공간과의 관계와는 또 다르게 2015년의 «안무사회»에서는 안무라는 것이 공동체 및 사회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 실험하셨죠.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가진 관습을 작업(안무)으로 표현하는 것, 사회적 코드가 있는 움직임을 작업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게 흥미로웠어요.
김해주 2013년 12월 민주노총 당사로의 공권력 투입을 기점으로 당시 총파업이 크게 일어났잖아요. 디자이너들이 총파업 포스터를 많이 만들었고요. 박근혜 정권 들어온 첫해 말에 ‘정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들이 표출된 자리였어요. 저는 시위에 잘 나가지 않는 편인데도 그때는 참여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강했어요.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생각보다 시위가 빨리 끝났어요. 대열이 너무 빨리 해산되는 거예요. 수많은 경찰병력이 도심을 둘러쌌고 이들은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기 대열을 조정하는 것 같고, 그 흐름을 모르는 일반 시민의 대열은 자꾸 분산되는 거예요. 그렇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사이 ‘어? 지도부에서 협상이 됐데’ 하고는 지인들과 저녁을 먹고 헤어지며 오던 중 ‘그런데 이게 뭘까’ 싶었던 거죠. 몸을 움직여 나간 보람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분명 경찰은 시위대에 대응하는 방식을 안무하는 훈련이 있을 것 같더라고요. 거기서 출발했어요. ‘사회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는 몸의 동작’이 있다면 그것도 안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특정 안무 된 동작에 대항해서 우리가 무언가를 공동으로 얘기하기 위해 다른 몸짓, 다른 안무를 필요로 한다면 그건 어떤 형식이 가능할까, 하는 고민이 든 거예요. 처음에는 시위대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동작을 안무가들과 만들어볼까 했지만, ‘사회적 안무’에 대한 생각을 좀 더 익히고 또 묵혀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먼저 교육, 직업, 이데올로기 등의 영향으로 사회적으로 안무된 몸, 공동의 몸에 대한 질문으로 넓혀 작가들과 백남준아트센터에서 퍼포먼스 프로그램으로 풀어낸 거죠. 여기에는 서동진 선생님의 강의도 있었는데, 독일에서 표현주의 무용이 나오던 시기와 동시에 그것이 파시즘, 전체주의와 연결되는 지점을 얘기해주셨어요. 무용기보법을 만든 루돌프 폰 라반의 몸의 움직임 분석이 산업사회의 생산효율성과 연결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강의였어요. «안무사회»를 준비하는 과정도 재미있었지만, 앞으로 더욱 구체적으로는 풀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아직 남아 있어요.
이경희 근대 산업사회의 정형화된 움직임을 안무라고 칭한다면, 2010년대에서는 밤에도 사람들이 핸드폰을 들고 보며 활보하는 게 아닐까 해요. 위험하지만 기이한 공통적인 움직임이거든요.
김해주 매체 변화에 따른 몸의 변화, 가상과 실제가 거의 구분 없는 몸의 상태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뉴미디어아트에 약간의 선입견과 거부감이 있었어요. 기술 구현형의 작업이나 관객과 단순히 자극과 반응을 주고받는 일차원적인 참여유도형의 작업이 오히려 ‘뉴미디어’를 고루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기술의 실험이 아니라 일상에서 접하는 매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시각과 몸의 작동 방식들에 대한 탐구에는 크게 관심이 가요. 이번 «무빙/이미지»에서 소개했던 줄리앙 프레비유의 작업이 그 예시 중 하나가 될 것 같은데, 미국에서 특허로 출원된 동작들, 가령 예를 들면 ‘밀어서 해제하기’와 같은 동작들을 모아 만든 작업이거든요. 아직은 기기로 상품화되지 않은 기기의 동작들도 미리 특허로 출원되어 있어요. 향후 새로운 기기의 등장에 의해 우리가 행하게 될 이 같은 동작의 아카이브는 결국 ‘사회적 안무’의 스코어(악보)이기도 한 거죠.
이경희 핸드폰이나 컴퓨터 좌판에 특화되어 몸을 쓰고 표현하는 것은 어려워들 하지만, 반면 머리로는 갈망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출발이 몸에 있는 퍼포먼스에 관심 갖는 것은 아닌가 하고요.
김해주 평면화 된 세계에 몰입하는 환경에 익숙해질수록 라이브라든지, 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 같아요. 퍼포먼스에서는 분명 나의 몸에 대한 자각과 타인의 몸에 대한 인지가 발생해요. 퍼포먼스 정의가 쉽지 않지만,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어떤 신체를 경험하면서 생기는 사건이라고 할 때 퍼포먼스를 보는 일이 나와 타자의 몸 (때로는 사물의 몸일 수도 있어요)의 형태, 반응, 감각에 대한 자각과 연결되거든요. 최근 김뉘연, 전용완 작가는 ‹문학적으로 걷기›라는 퍼포먼스에서 무용수 한 사람의 단순한 걷기 동작에 문학사의 ‘걷기’를 관통하게 했잖아요. 문학사를 동작으로 해석하고 재현한다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걷기’의 다양한 질감과 속도가 재미있었어요. 퍼포먼스는 단지 몸으로 표현하는 것의 감상을 넘어서 몸에 대한 자각이 연계되는 것이고, 그러한 자각이 굉장히 직접적이고 또 강렬할 수 있기 때문에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이경희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몸/신체성에 대한 터부가 있잖아요. 그래서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나 봐요. 잡히지 않으니 모호하고, 그래서 어렵고요.
김해주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 어색해하죠. 한편 길이나 대중교통에서 사람들의 물리적 거리는 매우 좁고 서로 막 밀치기도 하죠. 신체를 사용하는 것은 문화나 사회적인 코드와도 깊은 연계가 있는 것 같아요. 그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퍼포먼스의 재료나 분석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고요.
퍼포먼스 전시기획의 방법론
이경희 원래 전공은 다른 것으로 알아요. 그렇다면 신체성에 원래 관심이 있었나요? 퍼포먼스 전시를 기획하게 된 게 사담에서는 ‘하다 보니’라고 하셨지만, 방향이 수렴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김해주 학부 때 전공이 미술도 아니었고 처음 미술 관련된 일의 시작도 퍼포먼스가 아니었어요. 대학 때 우연히 전시 어시스턴트와 인턴을 하면서 전시 만드는 현장을 접했고, 퍼포먼스처럼 사라지는 작업이 아니라 헤비급의 설치 프로젝트도 많이 했어요.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와 부산비엔날레 코디네이터 때는 야외 설치가 위주여서 돌 다듬는 분, FRP 주물을 뜨는 분, 철공소 아저씨들과 일했어요. 대학 졸업 후 유학 중 2004–2009년에는 한국과 파리를 오가면서 간헐적으로 일했고요. 파리에서 제가 살던 곳의 지하철역이 퐁피두센터와 파리시립극장이 바로 연결되는 라인이어서, 저녁 먹고 숟가락 내려놓고 20분만 가면 시립극장에 앉아있을 수 있었는데, 당시 파리시립극장에는 유명 안무가들의 공연이 많았어요. 피나 바우시만 해도 6월마다 공연을 했으니까요. 그리고 퐁피두센터 지하 극장에도 스펙타클 비방Les spectacles vivants이라는 공연예술 프로그램이 계속 있었어요. 2000년대 중반은 미술관 내 퍼포먼스나, 소위 말하는 학제 간 프로그램이 많은 때였어요. 포스트 드라마틱 시어터3 계열의 작업이나 제롬 벨, 자비에 르로이 등 소위 말하는 ‘농당스Non-Danse’ 계열 작가들의 작업도 많아 관람객으로서 많이 즐겼어요.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 개관 페스티벌 업무를 제안받아서 1년간 일하게 됐는데, ‘페스티벌 봄’을 시작하셨던 김성희 선생님을 예술감독으로, 미술관 안에 일종의 가설극장을 설치하고 3개월간 주말마다 새로운 퍼포먼스를 하면서 매우 재미있게 일했고, 동시에 하드트레이닝이 되었어요. 미술관 내 가설극장과 미술관 안팎 여러 공간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하면서 블랙박스와 화이트박스의 차이,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의 작업 방식, 그리고 행정에서의 다른 이해들도 알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 퍼포먼스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이 파생되면서 계속하게 되었어요.
신체에 관심은 있지만, 저도 일상에서 신체를 대하는 게 익숙하지 못해요. (웃음) 제 신체를 다루는 것도 능숙하지 못하고요. 그런데 퍼포먼스는 자체로 이미 능숙할 수 없는 매체인 것 같아요.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는 불확정성을 안고 있는데, 그것이 위험요소이면서 동시에 흥미로운 부분이니까요.
이경희 전시기획 이외에도 드라마투르그, 에디토리얼 등 다양한 이력을 갖고 있어요. 특히 드라마투르그는 미술전시 큐레이팅과는 구별되는 역할인 것 같아 구체적으로 알고 싶고요.
김해주 저도 드라마투르그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해야 이상적인지를 고민 중이에요. 처음 하게 된 계기는 대게 작가들이 퍼포먼스를 처음 시작할 때나 극장을 처음 사용할 때 제안을 받은 경우들이었어요. 그들의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저의 관람 경험이나 극장 경험이 도움이 될 때요. 드라마투르그의 역할은, 작업에 대해 논의한다는 면에서는 기획자와 비슷한데, 작업에 훨씬 많이 개입해요. 기획자도 작업의 아이디어를 공유하지만 사실 작업 만드는 것까지 매일 쫓아다니지는 않잖아요. 하지만 드라마투르그는 사전 리서치에도 참여하고 제작, 연습 과정을 최대한 함께 하면서 지켜봐야 하는 스태프예요. 무엇보다 최초의 관객 역할을 해야 하고, 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작가와 계속 얘기하는 상대가 되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저의 경우 드라마투르그를 하면서 저의 코멘트가 작업에 영향을 많이 미칠 수 있다는 상황이 부담되기도 했어요. 깊게 개입할수록 제 판단과 인상이 작업에 영향을 미치게 되거든요. 어떻게 보면 작가의 역할을 나눠 가져야 하는데 저의 판단에 100% 확신이 안 들 때도 잦고요. 결국 제가 유능한 드라마투르기는 아니었던 거죠. 큐레이터, 드라마투르기 그리고 프로듀서의 역할이 조금씩 달라요. 그리고 어떤 성향의 작가와 일하느냐에 따라 일의 범위와 결이 조금씩 달라지니 매 상황에 유연하게 판단하고 대처해야 하는 것 같아요.
다원예술과 현대미술의 경계
이경희 안무가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들어온 가장 대표적이고 주목할 만한 예가, 아마도 최근 에르메스 재단에서 미술상을 수상한 정금형 작가일 텐데요, 미술계가 아닌 무용계의 연출가이자 안무가인 그가 이제는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어요. 이는 새로운 매체와 표현영역을 얼마나 소화하느냐가 작가의 예술적 역량을 가늠하는 척도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고요. 한때 다원예술이라는 명칭이 과분하게 소비되던 것은 지나, 이제는 현대미술과 다원예술을 구분하는 게 무의미해졌죠.
김해주 다원이 현상이 되어버려 너무 당연하다는 얘긴 저도 동의해요. 국립현대미술관의 프로젝트에서 ‘다원’이라는 타이틀이 사용되긴 했지만, ‘페스티벌 봄’도 사실상 없어졌고 다원예술이라는 구분은 점점 사라지는 추세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용어를 만들어 사용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 영역에서 올해 다원예술이 없어졌죠. 말씀처럼 저는 다원이 형용사지 명사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당연한 현상인 거죠. 그런데 10년 전에 굳이 다원이라는 지원제도가 왜 시작되었나를 생각해보면, 연극, 음악 등 개별 장르의 보수성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해요. 장르 간 협업이나, 다른 장르의 속성과 형태를 내 장르를 질문하기 위해 차용하는 건 동시대 예술의 어법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었고, 최소 20세기 초부터 있었던 예술의 성격인데, 조금이라도 이질적인 요소나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 있으면 지원되지 않는 소외영역이 생기다 보니 보호 차원에서 다원이란 명칭을 가져온 것이겠죠. 그렇다면 이제는 다원이란 이름을 떼어도 될 정도로 보수성이 해결 됐느냐, 여건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거든요. 지난 10년간 다원예술의 혜택으로 재밌는 작업과 시도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고 그것을 보고 성장한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도 있는데 이를 지속할 수 있는 플랫폼도 지원제도도 사라지고 있어서 아쉽죠.
이경희 하긴 «무빙/이미지»에 맞는 공간도 찾기 어렵다고 했죠.
김해주 블랙박스와 화이트박스를 갖춘, 그리고 대관이 가능한 공간이 거의 없거든요. 극장도 일반적인 프로시니엄이 아니라 가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좋고요. 그렇게 장소들을 추리다 보면 문래예술공장이 저의 반경에서는 유일한 선택지였어요.
이경희 시각예술과 퍼포먼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향유 입장에서야 구분해야하나 싶지만, 그럼에도 어떤 구분 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구분이 있어야 사고의 체계를 세우고 비평의 개입도 가능하니까요.
김해주 사실 제 머리에서는 시각예술(사)에서의 퍼포먼스, 즉 퍼포먼스 아트 또는 행위예술로 불리는 작업들이나 무용, 연극 등의 공연예술이 골고루 퍼져 있어요. 각각의 제도나 담론에 의해 어떤 땐 연극, 어떤 땐 무용으로 뭉치거든요. 이게 문제적 발언일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을 저는 퍼포먼스라고 불러요. 정교한 비평적 언어로 연극, 무용, 퍼포먼스 아트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엄밀한 분리를 두지 않아요. 서로가 잠시 묶였다가 흩어질 수 있는 유기체인 거죠. 그러면서 동시에 퍼포먼스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지속하는 중이고요. 용어를 정리하는 것은 일종의 각인의 효과도 있을 거라고 봐요. 다원이 유효하지 않더라도 다원이라는 용어를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예술에서의 다원성을 강조해야 하는 것처럼 퍼포먼스 또는 퍼포먼스 내부의 용어도 계속 사용하면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각인시켜야 해요. (웃음) 퍼포먼스는 아직도 존재확인을 해야 하는 연약한 매체거든요.
이경희 소외된 장르를 기획하는 독립 큐레이터의 한계도 있을 것 같아요. 독립은 곧 기금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걸 의미하기도 하니까요.
김해주 혼자 일하는 것의 장점이라면, 하고 싶은 것을 좀 더 명료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한정된 예산 안에서 혼자 일 하는 게 일의 양은 많아도 의사결정 과정도 빠르고 자유로움이 있으니까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에서 일하면 일과 일상의 균형도 유지할 수 있고, 무엇보다 싫은 것을 안 해도 되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에요.
아무래도 기금에 의존해서 일을 진행하게 되는데 기금 규모보다 더 불안정한 것은 작가들과 길게 계획을 세울 수 없다는 거예요. 어떤 프로젝트를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기금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약속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기존의 작품들을 다시 가져오거나, 전시장이나 공연장을 벗어나 최대한 가벼운 형태로 만들 수 있는 전시들을 기획하기도 했어요.
제가 독립 큐레이터라는 명칭으로 보통 불리지만 엄밀히 ‘인터-디펜던트interdependent’ 가 맞아요. 계속 제도와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독립 큐레이터란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완전히 독립이라는 말에 어울릴 만큼 자율적으로 일하는 게 아니어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적절한 언어가 뭘까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이를테면 ‘프리랜서freelance’라는 용어도 있지만 어원은 중세 유럽의 창 들고 싸우는 기사에서 온 것이잖아요. 결국 여러 영주들을 위해 고용되어 싸우는 계약용병이니 마찬가지인 거예요. (웃음) 우디 앨런 영화에 미술컨설턴트를 하는 인물이 등장해 자신을 소개하는데 자막으로는 ‘프리랜서’라고 했지만 실제는 ‘selfemployed’라는 말을 썼어요. 그렇다면 나도 그와 같은 자영업자인가 싶은데, 저는 일을 해도 돈을 못 버니 ‘또 자영업자는 아닌가?’ 했어요. (웃음)
이경희 끝으로 준비하거나 다루는 주제가 있나요? 요즘 관심 있는 것은 어떤 건가요?
김해주 최근의 작업들이었던 «무빙/이미지»나 «안무사회»에서 아직 마무리를 다 짓지 못한 지점을 글로 정리하거나 책으로 만들려고 해요. 그리고 «무빙/이미지»처럼 한 작가의 다양한 매체적 스펙트럼을 동시에 보여주는 기획을 좀 더 해보고 싶어요.
*본 인터뷰 타이틀은 김해주 큐레이터의 글에서 착안한 것이다. “퍼포먼스는 전시에 수반되는 이벤트의 성격을 떠나 몸과 시간과 제도를 질문하는 특정한 예술 언어로 실행되고 있다. 퍼포먼스의 휘발성은 반드시 그 시간 그곳에 가서 경험해야 한다는 불편함을 안고 있지만, 무엇이든 기록하고 쌓아놓는 미술의 제도적 관습에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다양한 시간의 경험을 전해주기도 한다.” ‹전시와 퍼포먼스›, «바자», 2015년 10월호
퍼포먼스, 몸과 시간과 제도를 질문하다
분량14,116자 / 30분 / 도판 3장
발행일2016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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