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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몽도 악몽도 아닌

함영준 × 이수연

2015년 젊은 작가에게 필요한 것 작가들에게 필요한 무대는 어떤 모습일까? 공공미술관의 한 모퉁이일까? 아니면 자유롭고 자립적인 공간일까? 특히 자신만의 작업실마저 갖지 못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습작과 실패작이 널려 있는 시행착오의 공간조차 없는 그들에게 필요한 전시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청년 작가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면 되는 것일까? 고독과 화해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한국 사회 속에서 청년 예술가들을 위한 활동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커먼센터 디렉터인 함영준과 시각문화 연구자 윤원화를 통해 들어본다.


함영준 현재 미술공간 커먼센터의 디렉터이자 일민미술관의 협력 큐레이터다. 비정기 문화잡지 『도미노』의 편집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매체에 미술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 대해 글을 쓰고 번역하고 있다. 사회와 환경의 변화에 따른 문화의 변동에 관심을 두며, 그러한 관심을 전시와 글로 구체화하고 있다.

인터뷰어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학위논문으로 「백남준의 퍼포먼스 연구-매체의 변화와 감각의 확장을 중심으로」(2007)가 있으며 사무소(SAMUSO)를 거쳐 200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동시대 미디어 아트와 영화, 퍼포먼스 등 매체를 통한 예술 외연의 확장에 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이수연 동인지 『도미노』의 창간자 중 한 사람으로, 혹은 클럽 ‘로라이즈’의 운영자로서 함영준 씨는 장르를 불문하고 문화계 전반의 현상들을 진단해 온 기획자로 잘 알려졌습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지난 2013년 11월에 개관해 미술계의 비상한 관심을 끄는 신생 공간 ‘커먼센터’의 디렉터로서의 고민과 활동에 대해 이야기 들어보고자 합니다. 젊은 작가들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장소로서 커먼센터의 전반적인 성격은 무엇인가요.

함영준 커먼센터는 공공의 재원으로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어떤 경우에는) 판매도 하기 때문에 미술관이기도 하고 갤러리이기도 합니다. 2000년대 이후 대불황 시대를 자양분으로 삼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활동에 주목하고 있고, 미술적인 방법으로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 과거와는 조금 거리를 두면서 닥쳐올 미래에 집중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또한 미술가가 운영하는 공간으로, 저를 비롯해 그래픽디자이너 김영나와 김형재, 그리고 작가 이은우가 멤버로 참여하고 있고, 운영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멤버를 늘여갈 계획입니다.

이수연 커먼센터가 크게 주목 받았던 전시들은 《오늘의 살롱》(2014), 《스트레이트: 한국의 사진가 19명》(2014)과 같은 그룹전이었습니다만, 그동안 모두 9개의 전시 중 5개는 개인전 성격이었습니다. 혹시 바깥에서 초점이 맞추어지는 커먼센터의 성격과 실제 커먼센터의 지향점 사이에 간극이 있지 않은지 궁금합니다.

커먼센터 내부 전경, «오늘의 살롱» (2014. 3. 27 ~ 5. 18) / 사진 제공: 커먼센터

함영준 궁금해하시는 전시 운영의 특징은 실질적이고 경제적인 이유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클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커먼센터는 별도의 재단이 없습니다. 작년에는 기금을 따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 비용으로 운영했습니다. 따라서 장기적 계획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전체 운영 스케줄이 탄력적인 편이어서, 젊은 작가들이 기금 등을 받아 전시를 문의하는 경우에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커먼센터에는 꽤 많은 전시 문의가 들어오는데, 《청춘과 잉여》(2014)의 경우도 외부 문의를 검토한 끝에 실행한 전시이고, 특히 기금 신청이 완료되는 3, 4월경에는 전시 문의가 일주일에는 서너 건 이상 들어오곤 합니다. 이번에 오픈한 김덕훈 작가의 경우도 《오늘의 살롱》 전을 통해 인연을 맺고 개인전을 한 경우입니다. 30, 40대 작가들의 전시 사이클이 기금에 많이 맞추어 있어서 커먼센터의 전시도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개인전의 경우는 3, 4월에 전시를 정하고 10, 11월경에 추수를 한다고나 할까요. (웃음) 물론 문의가 들어와서 진행하는 작가들의 개인전이라고 해도, 작가를 정하고 작품을 선정하는 등의 기획을 거치면서 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함께 합니다. 구체적으로 작가들과 일하는 방식은 사실 경우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겠네요.

물론 커먼센터 디렉터로서 여건이 된다면 이 같은 개인전뿐만 아니라 일정한 경향의 젊은 작가군을 모아서 기획전, 즉 그룹전을 지속해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구체적으로 개별 작가들을 프로모션 할 계획을 따로 잡은 것은 아닙니다.

커먼센터 내부 전경, «오늘의 살롱» (2014. 3. 27 ~ 5. 18) / 사진 제공: 커먼센터

이수연 그렇다면 커먼센터에서 젊은 작가를 선정하는 구체적인 기준은 무엇인가요?

함영준 ‘작품이 좋아야 한다’입니다. 물론 ‘좋다’는 기준 자체가 굉장히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저는 2000년 이후의 한국 현대미술에는 미술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미술사를 써나가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따라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중요한 커다란 흐름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 흐름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기회를 지원하는 편입니다. 세상을 인식하는 법에 대한 작업, ‘자신 세대의 고유한 경험’을 미술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을 시도하는 작업과 작가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이수연 ‘자신 세대의 고유한 경험’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커먼센터가 젊은 작가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자연스럽게 최근 다시 화두가 된 세대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젊은 건축가들의 세대론에 대해 짚어본 《건축신문》 10호에서도 SoA(Society of Architecture)는 “세대론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인 기준을 넘어서서 반동하거나 수용할 대상, 혹은 진화에 필요한 대화의 상대가 선재해야 한다. 그럼에도 현재의 세대는 반응할 체제(건축 혹은 미술)가 없어서 정의되기 힘든 세대론적 숙명을 타고났다”고 했습니다. (이상헌, 『대한민국에 건축은 없다』, 이종건, 『건축 없는 국가』) 미술계에서도 급격히 세대론이 부상하는데, 특별히 미술에도 세대론이 있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함영준 미술의 방법론은 최근 2, 3년 사이에도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작가들이 오브제에 초점을 맞추어 페티쉬적인 작업들을 많이 선보였는데, 최근에는 젊은 작가들이 자신들이 10대를 보낸 토양인 서브컬처에 주목하여 그것을 작업의 주요 레퍼런스로 활용합니다. 커먼센터에서는 세대론이라고 해서 특별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를 통해서 이처럼 지금 당장 젊은 세대들이 관심 있는 것들을 순발력 있게 보여주고자 합니다. 커먼센터가 갖고 가는 세대론의 프레임은 ‘현재, 지금 해야 하는’ 미술적인 행위들, 미술이라고 여겨지는 것들, 미술 교육 등에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젊은 세대의 공간이 되는 셈입니다. 물론 저는 그다지 젊지 않습니다만.

이수연 이러한 공간을 운영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70년대 중·후반생들이고 (저를 포함해) 세대론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세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론을 통해서 젊은 작가들을 바라본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일종의 ‘후배 챙기기’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함영준 그러고 보니 커먼센터의 운영진 중에서 80년대 생인 이은우 작가를 제외하고 김영나, 김형재, 그리고 제가 모두 70년대 중후반생입니다. 제 경우에는 특별히 후배를 챙기는 것은 아니고 ‘낀 세대’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계에서 우리 세대는 머릿수도 많지 않았고, 행동하거나 움직이지 않는 세대였습니다. 저 또한 2010년에 서른세 살이 될 때까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지내다가, 답답한 마음에 우리 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그런 뜻에서 잡지 『도미노』를 공동 창간했습니다. 물론 누구나 자신이 낀세대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특히 저는 ‘끼어있음’이 굉장히 익숙합니다. 진보Liberal라는 입장이 한국사회에서 끼어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제가 속한 세대는 격렬했던 60년대 후반 세대의 막내 세대이자 최근 부상하고 80년대 중·후반 세대의 형이 되는 세대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맏형으로서의 아이덴티티보다는, 막내 세대로서의 자각이 더욱 강한 것 같습니다. 요즈음 한창 활동하고 있는 85, 86년생 세대의 작가들과는 두뇌구조가 조금 다른 듯하고, 저와 7, 8살 차이가 나는 박해천 씨나 임근준 씨와 더욱 가깝게 느껴집니다. 사실 요즘 일어나는 ‘청년관’ 등의 운동들은 형들의 운동의 유산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젊은 작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아래 세대의 운동들이 지금은 미약하고 미숙할지라도 시간이 가고 그들이 자리잡으면, 이들의 노력이 수면 위로 부상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향후 3, 4년 뒤에도 이러한 작업을 지속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고, 그 작업이 의미가 있다면, 한국 현대미술의 커다란 흐름으로 자리잡을 겁니다. 커먼센터를 열면서 기대했던 것은 후배를 견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 투명한 세대의 플랫폼을 시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일들은 알아서 진행되리라 기대합니다.

이수연 커먼센터는 세대론에 있어서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고, 뛰어 노는 공간이라는 개념이 강하다고 하셨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방향을 제시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미 커먼센터 뿐이 아니라 이에 관련한 윗세대의 여러 활동을 통해서 그러한 경향이 상당히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함영준 윗세대들은 일을 하는 방식의 프로토콜을 갖고 있었습니다. 선언하고 공표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조직을 만들고, 운영하고, 치열하게 싸웁니다. 저는 이런 것과 조금 떨어져서 DT(디자인 텍스트) 동인을 만든 형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막내입니다. 따라서 커먼센터를 운영하게 되면서 디렉터의 역할을 맡았지만, 윗세대 조직의 프로토콜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디렉터로서 기자들에게 전화하고, 직접 홍보하고 작품을 파는 등의 사회적인 활동을 앞장 서서 하고 있는 상황이긴 합니다. 또한 여러 길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서 있는 젊은 작가들에게 여러 조언을 하고 권유를 하게 되기도 합니다. 커먼센터를 운영하는 1년 동안 점점 기성세대가 된 느낌이 드는 점은 있네요.

이수연 투표도 하지 않고 사회의 여러 문제들과 거리를 두며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않던 세대 이후에 등장한 젊은 세대들이 격렬해진 지점에는 경제적인 빈곤의 문제가 있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지금 하시는 노력들은 경제적으로 빈곤한 미술계 전체의 파이를 키운다기 보다는 젊은 작가들을 기존의 시스템에 편입시키려는 노력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함영준 우선 사회적인 경제 시스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80년대 중·후반 세대들에게는 ‘가난한 세대’라는 것이 일종의 태깅Tagging이 되어 있습니다. 고속 성장을 당연시하였던 이전 세대와 다르게, 이 세대들은 성장이 멈추고 심지어 경제가 퇴보하는 사회를 겪게 될 확률이 큽니다. 따라서 젊은 세대들은 심리적인 위축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가난한 상황을 겪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이 그냥 예정되어 있는 비극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신자유주의적이고 잉여로운 분야인 미술 쪽에서 일을 하면서 이에 대해서 대책을 마련한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듯 합니다. 미술이라는 것은 쓸모 없는 것과 쓸모 있는 것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각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인 만큼, 있는 시스템 속에서 계속해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젊은 작가들에 대한 지원의 문제는 어떤 재화를 어떻게 나누어 쓸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제 생각은 미래를 바라보는 젊은 세대들에게 일부라도 나누어 주자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파이를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람을 바꾸어 나가기 시작한다면 변화의 단초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기존의 미술판에 젊은 작가를 흡수시킬 수 있는 체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수연 한편, 기존의 시스템에 편입하는 것 외에 젊은 예술가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해 살펴보자면, 아무래도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잘 알고 계시고 함께하셨던 두리반을 떠올리게 됩니다. 최근 <파티51>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개봉되어 새삼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함영준 많은 사람들이 두리반과 같은 케이스를 젊은 예술가들의 가능성을 보여준 모범 사례로 꼽으며 부러워합니다. 다만, 두리반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었으며 박다함 씨나 한받 씨와 같은 구성원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리반이라는 칼국수 집에서의 문제해결 방식은 통상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푸는 사회적인 방식이라기 보다는 문화적인 방식의 저항이었고, 그것이 먹혔던 것은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복잡하게 고민을 하고 토론하기 보다는 ‘누가 쫓겨 났다, 불쌍하다, 같이 놀자’와 같은 공식이 성립하는 것이지요. 두리반에서 음악을 하고, 듣고, 참여하고 있으면 날뛰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아나키스트와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음악은 에너지를 응축시켰다가 폭발시키는 힘이 있이 있습니다. 두리반의 성공은 명분과 구성원의 힘도 있지만, 음악 자체가 좋았던 것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수연 그렇다면 미술에서의 전망은 어떨까요. 옥인 아파트와 같은 예가 있긴 하지만, 미술은 음악과 분명히 다른 인터페이스를 갖고 있고, 이러한 점이 커다란 차이를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함영준 미술은 음악과는 분명히 다른 지점이 있습니다. 미술은 음악처럼 에너지를 응축시켰다가 한꺼번에 다 같이 내뿜지 않습니다. 또한 음악처럼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인터페이스를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한 명 한 명의 작가가 각자 목소리를 독특하게 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식의 미술적 저항행위가 지속 가능한 것인지는 조금 의문이 듭니다. 그 지속성이나 단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리슨투더시티와 같은 생활공동체와 같은 그룹이 만들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수연 무엇보다 미술과 음악의 인터페이스가 다른 점은, 미술작품은 미술관이든, 갤러리든, 센터든 혹은 길거리든 전시라는 기회를 통해서 보여진다는 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최근 작가들의 작업 형식인 설치나 다큐멘테이션, 퍼포먼스, 장소 특정적 작업과 같은 형식들은 특히 작업의 생산 자체가 전시에 기대어 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함영준 커먼센터를 운영하며 젊은 작가들과 작업을 하게 되면 그런 점을 많이 느낍니다. 30살 먹은 가난한 음악가와 동년배의 미술가를 비교해보면, 음악 하는 친구가 훨씬 자유롭다고나 할까요. 기타만 있으면 일단 작업의 생산이 가능하니까요. 음악의 경우 앨범을 내준다고 프로덕션에서 제안을 하고 펀딩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곡을 쓰고 (하다못해 유튜브에서라도) 공연을 할 수 있는데 반해서, 미술 작가들은 그러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작가들이 작업을 계속한다고 하더라도 작업을 완성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작업을 구현하고 완성시키는 데에는 자금이 들어가니까요. 전시를 기획할 때도 작가들에게 일단 “뭐 재미난 아이디어 없어요?”라고 시작을 합니다. 재미난 아이디어가 있으면, “우리 그룹전 할 때 같이 할래요? 예산은 얼마 정도에요.”라고 프로덕션을 의뢰하면서 전시가 시작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미술은 훨씬 기회중심적인 셈입니다.

LESS와 기획하였던 《스트레이트-한국의 사진가 19명》 전시에서도 80% 이상의 사진 작가들의 작업을 디지털 파일 그 자체로 웹하드에서 받아서 선정을 하였습니다. 사진을 인화하여 완성형의 형태로 갖고 있을 수 있는 여건의 젊은 작가들은 거의 없기 때문에 작업들을 선정하고 기획하여, 전시형 포맷으로 물화시키는 과정에서 미완성형의 아이디어가 실제 작품처럼 작동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입니다.

이수연 마지막으로 미래의 계획에 대해서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함영준 위에 말씀 드린 문제와 관련하여 6월 즈음에 전시를 하나 기획하고 있습니다. 아예 작가들이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고 실현하지 않았던 작업들을 커미션하여 전시를 꾸려보면 어떨까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전시가 기회비용이나 재원의 문제와 닿아있기 때문에, 큰 기관에서 실험하기 어려운 것들을 커먼센터에서 실험해볼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향후에도 커먼센터의 여러 실험들은 이러한 틈새적 활동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커먼센터 외부 / 사진 제공: 커먼센터

길몽도 악몽도 아닌

분량7,978자 / 16분 / 도판 3장

발행일2015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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