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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의 읽기와 쓰기

정희진

억지로 읽기

말과 글은 오해를 피할 수 없지만 오해받으면 누구나 억울한 법이다. ‘오해’의 역사는 깊다. 분서갱유나 중세시대 파문破門은 오독이란 결국 권력 행위이며 당사자에게는 생사의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현행 국가보안법은 북한이나 이데올로기 관련 사안처럼 보이지만, 앎에 대한 사법적인 동시에 무의식적인 통제라는 점에서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이슈다. 책과 관련된 의도된 오독과 정치적 사건들을 상기하면, ‘읽기’가 호모 사피엔스임을 뽐내는 인간의 대표적 행위 같지만, 실상 인간은 그다지 ‘사피엔스’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독서가 언제나 마음의 양식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장’이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글쓰기 강좌나 인문학 열풍은 역설적으로 140자 이상을 쓰고 싶은 욕구를 반영한다. 더 문제는 댓글이다. 차라리 이전 시대의 ‘이단’, ‘수정주의’, ‘사이비’ 논쟁(?)이 부러울 정도로 지금은 댓글이 담론 행위를 대신하고 있다. 악플은 중요한 문화 현상이다. 인터넷 여론, 지속적인 악플, 채팅 중 성희롱 등으로 인한 자살 사건은 과학자들의 기대와 달리, 가상 세계의 자아인 아이디ID와 현실의 자아가 분리될 수 없으며 정보 격차digital divide로 인한 차별은 현실 세계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나는 20여 년 동안 글쓰기로 생계를 꾸려왔다.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내가 인터넷과 휴대전화, SNS를 사용하지 않아서 몰랐던 덕분인지 악플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최근 친구들을 통해 내 글에 대한 SNS의 일부 여론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얼마 전 프랑스 잡지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 사건에 대한 두 편의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1 나는 표현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표현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이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이들이 누구인가에 따라 표현의 자유는 폭력일 수도 해방일 수도 있다고 썼다. 즉 표현의 자유의 ‘단점’을 지적한 것인데, 이는 이미 많은 이들이 논의한 것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더구나 나는 이슬람인의 ‘테러’, 이슬람 사회의 여성 억압을 옹호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페미니스트’와 ‘인권운동가’들이 퍼붓는 집중적인 조롱과 욕설을 경험했다. “어이없다, 미친 X”, “테러를 옹호하는 변절자”, “이슬람 사회의 여성 억압을 지지하는 여자” 등이 주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반응은 내가 “미국에서 성적 소수자(LGBT,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를 위한 법이 제정되면 미국으로 건너가 성적 소수자 인권 옹호법 반대 데모를 할 사람”, “모골이 송연하다”는 비난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법을 반대하기 위해 미국까지 갈 의사도 기운도 없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슬람 세계의 여성 억압 지지로 연결된 것이다. 어떻게 살면 이런 사고가 가능할까. 예전에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면 몇몇 어른들이 “남한이 그렇게 싫으면 북한 가라~”고 말하곤 해서 웃은 적이 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똑같은 논리가 행해지고 있다. 게다나 그때 “북한 가라~”고 말하는 이들은 전두환 씨의 민정당에 투표하는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첨단 진보적이라는 이들이 그러한 이분二分 논리를 펴고 있다.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위의 사례는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그럼, 배를 재배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냐?”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우리 사회의 일상적 대화들, 예를 들면 “(모 후보의 선거 구호가) 사람 중심이었잖아요? 사람 그거, 주체사상 아니에요?” 이런 식의 말이 방송에 나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또한 생존권을 주장하는 사회적 약자에게 “굶는 건 아니잖아?”, “양성평등이라며? 근데 왜 여자는 군대에 안가?”도 마찬가지 사례다. 이러한 반응은 그냥 억지다. 억지를 부릴 수 있는 근거는 우리 사회가 이분법, 흑백논리, 양비론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분노를 감추지 못했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해 고민해야 할 문제는 개탄이 아니라 상황의 ‘배후’이자 전제다. 글쓴이와 독자 모두에게 하나의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연결되는 것, 즉 말의 연쇄는 자연스러워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자연스러움은 불가능에 가깝다. 비약이나 도약은 시詩가 되기도 하고, 사유의 단계를 건너뛰는 방법은 훌륭한 논리학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절제와 생략이 주는 감동은 예술의 본질이다. 모든 글은 독자가 새로 쓰는 법인데, 질문은 이것이다. 말의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억지가 되고, 어떤 경우에는 시가 된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과정으로서의 독서

‘억지 부린다.’에서 억지抑止는 말 그대로 타인을 억압抑壓하여 사유를 강제로 멈추게(止: 그칠 지) 하는 것이다. 위에 적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원인 중 하나는 ‘억지’로 책을 읽어야 하는 입시 제도와 ‘교양인 강박증’이라고 생각한다. 두 경우 모두 억지로 책을 ‘보는’ 것이다. 이는 읽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괴로운 일이다. 이런 독서는 시간 낭비다.

책 읽는 노동이 싫어서, 혹은 수고를 던답시고 더 심각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다이제스트나 요약본으로 줄거리만 읽는 것이다. 최근에는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작은따옴표는 필자 표시)이라는 노골적인 제목의 책이 시리즈로 나왔다. 실제 책 내용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제목이 주는 충격은 컸다. ‘넓고 얕은’ 지식은 오히려 반反실용적이다. 중고생들이 보는 영어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문법 문제 중에, ‘정보information’의 복수형을 묻는 문제가 있다. 정보가 가산可算 명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인포메이션’은 집합명사로 단수형을 쓴다. ‘information’은 복수형이 없다. “정보의 바다”, “정보량이 많다” 등의 표현을 생각하면, ‘정보’가 단수형이라는 사실이 의외처럼 보이지만 정보는 일종의 사고 체계의 산물이기 때문에 추상명사에 가깝다.

책을 읽는 것, 아는 것, 사유 능력은 모두 다른 차원으로,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고 지적인 대화가 가능한 것도 아니며, 지식(정보)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가이다.

내가 생각하는 책 읽기의 목적은 두 가지다. 즐거움 자체 그리고 사유 능력(콘텐츠 생산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읽는 과정 자체가 즐거운 경우라면 황색 저널, 펄프 픽션, 각종 장르물도 나쁘지 않다. 어떤 책이 즐거운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대중이 킬링타임용 책을 좋아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사람들의 취향과 필요는 대단히 다양하다. 우리 출판문화는 참고서, 수험서, ‘여성지’에 지나친 비중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 필요이지 대중의 ‘본질적인’ 욕구가 아니다. 저자나 출판사들은 자기 수준에서 독자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독자는 언제나 저자를 앞서간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정언 명령은 없다. 문제는 왜 읽는가이고 본인 스스로의 요구가 없다면 안 읽어도 된다. 요즘은 책보다 몇 배 훌륭한 영화나 드라마, 게임도 많다. 내가 좋아하는 책은 읽는 시간이 즐겁거나 생각하는 법, 질문하는 법, 문제 제기가 많은 책이다. 그래서 주로 읽은 책은, 정신없이 따귀를 맞는 기분이 들 정도로 지적 자극을 주는 책들이다. 좋은 게 좋은, 지당하고 ‘아름다운’ 말들을 늘어놓는 책은 읽지 않는다.

약은 원래 좋은 의미에 가깝다. 그러나 독자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질적인 비약이 아닐 때, 즉 한 문장과 다음 문장 사이에 긴장이나 사유의 공간이 없고 텅 비어 있을 때 -통념적 사고로 채워져 있을 때- 그것은 억지가 된다. 특히 인터넷상의 논쟁은 글자 제한이 있는 데다 필자(?)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억지는 거의 필연적이다 (“얼굴을 보고 할 수 없는 말은 댓글로도 하지 맙시다”라는 악플 방지 캠페인을 생각해보자).

억지와 독설의 조합, ‘분단 상황으로 인한’ 배타적 사유의 고착은 우리 사회의 고질이다. 사회를 후퇴시킨다. 거듭 말하지만, 책을 읽는 이유는 지식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읽는 과정에서 생각하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다. 지식은 그 훈련 과정의 열매일 뿐이다. 스스로 사유 방식을 갖게 되면,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이 된다. 이것이 바로 실제 학력學力이요, 공부다. 학력學歷이나 학벌이 교양인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독자를 저자로 변화시키는 책

헤르만 헤세는 소설 외에도 생전에 3,000편의 서평을 남겼다. 이런 이들에게는 공부와 독서의 왕도가 따로 없다. 그러나 나처럼 ‘석학’이나 위대한 예술가가 되려는 망상을 버린 일반인은 어느 정도의 독서 ‘요령’이 필요하다.

나의 책 읽기 원칙은 다음과 같다. 물론, 일반화할 수 없는 철저히 개인적인 차원의 거칠고 독단적인 판단이다. 내가 읽지 않는 책이 있다. 베스트셀러, 소위 ‘치유서’, 자기 계발서 등은 안 읽는다. 또한 특정 저자의 책은 읽지 않는다. 여기서 저자는 개인이 아니라 특정 인구학적 집단을 의미한다. 경험상 어떤 타입의 사람이 쓴 책들은 여지없이 ‘꽝’이다. 광고가 지나친 책도 읽지 않는다. 좋은 책은 광고 한 줄 없이 입소문으로 스테디셀러가 되게 되어 있다. 유명 인사들의 에세이 류도 읽지 않는다. 재테크 종류 책은 안 읽는 게 아니라,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이런 책을 제외한 나머지 책은 모두 관심 대상이다. 우리 집 책장을 보고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도대체 전공이 뭐냐?” 우울증, 중독, 자살 등 특정 주제에 관심이 생기면 그 분야의 책은 ‘마스터’하려고 노력한다. 한 분야의 책을 10권 정도 읽으면, 누구나 그 분야의 반쯤 전문가가 된다. 책 자체의 내용(줄거리)을 파악하기보다는 주로 저자의 발상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읽는다.

많이 읽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고 능력을 키우는 데, 나를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다각도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자극이 없는 책 100권을 읽으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생각의 모서리가 있는 책은 한 권 읽은 후에도 내가 열 권의 책을 쓸 수 있는 역량을 준다. 독자를 저자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저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업무든 인간관계에서든 삶과 자기 생각을 매력적이고 ‘개념 있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모두 저자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정희진처럼 읽기』(교양인, 2014) 저자

지금, 여기에서의 읽기와 쓰기

분량5,102자 / 10분

발행일2015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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