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없이도 건물은 얼마든지 선다
김광현
분량5,622자 / 10분
발행일2015년 4월 22일
유형오피니언
고귀한 작품으로서의 건축
‘건축가의 일’이라면 이 나라의 건축가라는 이름의 직업을 가진 수많은 이들은 건물을 설계해 그 설계대로 잘 지어지게 하고, 그것이 시작이고 마지막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일까? 문제는 너무나 많은 이 직업의 전문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다는 데 있다. 그러니 그렇지 않다고, 달리 생각해 보자고 강조한들 또 다른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것이 분명한데, 이런 주장을 할 필요가 있을까?
건축가의 일에 대하여, 역할과 사명에 대하여 다른 질문을 해 보자. 이 세상, 이 땅에 사람이 살게 되면서 무수한 집을 지어 왔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도시에도 짓고 산에도 짓고 신석기 시대에도 지었고 오늘날에도 짓고 있다. 그러면 과연 그 수많은 집 중에서 건축가가 지은 집은 몇 채나 될까? 그리고 몇 퍼센트나 될까? 오늘날 우리 땅에 지어진 집은 얼마나 되며 건축가는 그중에서 몇 채나 지었을까? 물론 건축사 제도가 생긴 이래 지어진 그 집들은 모두 건축 허가를 받았으니 누군가의 이름으로 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건축가란 건축허가를 받은 이들 모두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건축에 대한 무언가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고 자기가 설계한 건물을 ‘작품’이라고 여기는 이들을 말한다. 그런 건축 작품 중에서 건축잡지에 선정된 고귀한 ‘작품’은 그 모든 건물 중에서 얼마나 되며 사회에 무슨 이득을 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고귀한 ‘작품’에만 최고의 가치를 두도록 교육을 받은 미래의 건축가들은 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들만의 희소가치
피터 콜린스Peter Collins의 유명한 책 『근대건축 개념과 변화』 중 미식학적인 유추The Gastronomic Analogy라는 장에 이런 글이 있다.
“요리사는 만들어지지만, 요리 장인은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한 브리야-사바랭Brillat-Savarin의 ‘격언 15번’과 같이, 1세기 후에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도 다음과 같이 ‘격언 1번’을 기록했다. “기술자는 만들어지지만 건축가는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 건축가가 기뻐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자칭 건축가라고 하지만 그는 기술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뜻이다. 그리고 콜린스는 그 앞에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모든 젊은 건축가들은 스스로를 창조적 예술가로 여긴다. 왜냐하면 건축교육의 모든 체계가 이러한 생각을 부추기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축이 미식gastronomy이나 연극보다 못한 것이 있다. “미식학이나 연극 그리고 음악에서 예술가의 독창성이 가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결정짓는 것은 소수의 전위적인 감정가와 잡지 편집인들이라기보다 일반 대중이기 때문에 진귀하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날 수 있다.”
콜린스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리하면, ① 대부분의 사람이 건축가와 비슷한 기술자이며 요리사이지, ‘요리사 장chef’은 되기 어렵다는 것, ② 요리사는 오래전부터 정해진 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건축가는 계속 새것만 찾고 최신의 요리법만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는 것, ③ 건축은 소수의 전위적인 건축가와 그들과 의견을 같이하는 평론가 또는 건축잡지가 만드는 것이지 대중이 판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건축가의 개인적인 표현, 그들만의 스타일, 고상한 철학적 언사가 모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건물이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고상하게 ‘나’를 표현하는 건축을 ‘작품’이라고 하고, 사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모르는 채 자기도 모르는 말로 고상하게 보이려 치장하는 건축가는 자신이 이미 지나버린 철새임을 모르고 있다. ‘나’를 기준으로 ‘나’를 표현하고 그 ‘나’를 파는 건축가로는 사회에 대응하고 도시의 현실을 만들 수 없다. 고상하게 들리는 미식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대중이 정하는 것이다. 미식이 이러한데 건축에서는 건축잡지에서 건축가끼리 주고받는 평가로 희소한 가치를 정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지도능력이 부재한 건축가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윌리엄 콘하우저William Kornhauser는 이런 말을 했다. “대중사회의 엘리트는 스스로 엘리트라고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대중이라고 느낀다. 그 결과 엘리트는 강력한 지도능력이 부족하다.” 이 말을 바꾸면 이렇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대중사회에서 건축가는 스스로 엘리트라고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대중이라고 느낀다. 그 결과 건축가는 강력한 지도능력이 부족하다.”
당연히 건축가는 엘리트다. 그렇다고 근대건축의 개척자와 같은 계몽형 건축가나, 건축을 통한 윤리의식을 강조하는 법정 스님 형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 말을 받아들이지 마시기를. 아무튼 현대 대중사회에서는 어느 사이에 건축가가 스스로를 그저 여러 전문직업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잡지가 아닌 유명 대중잡지에 나오면, “어, 저 사람 잘 나가겠는데?”하고 생각해주고, 내가 보기에는 내용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떤 건축가가 유명 연예인처럼 텔레비전에 자주 나와 강연을 하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그러니 저렇게 많이 나오지?”라며 자신의 판단 수준을 스스로 끌어내리는 경우도 적지 않지 않은가. 건축학과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요즘 틀렸으면 틀렸다, 옳은 것은 옳다고 나서서 말하지 않는다. 어느 사이에 건축문화의 권력자가 된 이들은 그렇게 나서 보아야 별로 득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콘하우저가 말한 대중사회에서 엘리트의 ‘지도능력’이라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사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앞서서 말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면 어떨까. 엘리트 건축가가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길 만한 건축 유형인 코스트코 매장은 누가 고안하였을까? 이케아는 누가 어떻게 그렇게 만들자고 했을까? 시내 곳곳에 있는 저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편의점은 과연 누가 제안하고 개발하였는가? 주택의 식당이 도시로 빠져나가 먹자골목이나 먹자빌딩으로 바꾸게 한 이는 누구였을까? 러브호텔은 누가 설계하기에 저토록 많이 지어지는 것일까? ‘YES 24’와 같이 정보와 유통 우선의 건물을 짓자고 제안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농촌주택개량사업이나 도시계획이나 조경하는 분들이 열심인 농어촌뉴타운 조성사업에 능동적으로 참가하여 ‘이렇게 건축해야 한다’고 제대로 제안하는 건축가는 누구누구일까? 지역성이 중요하다고 말을 하지만, 어떤 지역에 충실한 건축가는 과연 많이 계신가?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많은 일에 건축가는 지도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사회에 대한 중요한 임무인 건축가의 공공적 역할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괜찮은가?
건축가의 진정한 책무를 외면하는 사회
건축가가 사회로부터 정당한 일을 얻고 정당한 대우를 받으려면 사회에 전문가적인 제안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필요한 것은 근사한 건축가의 언어와 스타일을 구현했다는 ‘작품’이 아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건축유형을 제안하는 것이다. 근대건축의 개척자들은 새롭게 전개되는 사회에 어떤 건축유형이 필요한지를 알았고 그것을 제안하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많은 전문가가 저 수많은 아파트 설계는 잘 풀어 주었지만, 그 이후에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집합주거의 유형을 오늘날의 건축가들이 따로 제안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건축가가 자기 일을 넓혀 가려면 정말 사회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사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건축가가 본래 하고자 하는 바를 잘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든지, 예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치단체가 주도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건축가의 공공적 책무는 아닐 것이다.
나는 일간지에서 특정 건축가의 설계 스튜디오 내부를 큰 사진으로 소개한다든지, 해괴한 형태를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라고 칭찬하는 대문짝만한 기사는 본 적이 있어도, 온 국민이 다니는 학교 건축이 중요한데도 그것이 왜 저렇게만 설계되어야 하는지, 모여 살며 삶을 꾸려나가게 할 집합주택이란 이런 것이라든지, 역사유산을 이어받은 시설로 이렇게 우리 생활을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든지, 아주 싼 값으로 지어진 지역의 건축에 모든 사람이 기뻐하고 그것으로 지역이 힘을 얻게 되었다든지 하는 기사를 별로 보지 못하였다. 매사가 작가 건축가, 작품 건축만 추켜올릴 뿐이다.
건축가의 진정한 직능
지금 건축가가 해야 할 일은 ‘작품’을 만든다는 의식을 접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사회자산을 만든다는 의식을 앞세우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무슨 좋은 말이 나오면 유행어로 전락해버리기 일쑤인 우리 건축계는 과연 환경보전, 지속가능한 사회의 형성을 얼마나 진지하게 자기 일로 여기고 있을까? 건축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은 좋은 건축이나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에는 흥미가 있지만, 건축 관련 직능에 대한 일이나 이해관계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어떤 체제여야 건축 직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설득하려고 하기보다 (심지어는 지금은 이런 일도 안 하지만), 어떤 건축이나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가를 제안하는 것이 먼저다.
왜 건축가는 설계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하여 ‘건축가는 사회를 위한 역할을 너무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묻고 싶지 않은 질문을 되묻게 된다. 사실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치고 실무에서 하는 일 대부분은 특별한 계층이 주문하는 일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골몰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결국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하는 일임을 뒤에서 고백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건축설계란 사람들의 생활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 모든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누군가가 소비하기 위해, 그 소비를 목표로 하는 이익을 위해 건축설계를 한다. 건축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이렇게 공공과 사회를 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몸을 돌리면 건축주의 이익을 위해 각종의 건축법규를 잘 응용하여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는 안을 설계해야 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입장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 건축가다. 상업시설을 위한 설계가 아니라, 건축설계 목적 대부분이 상업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런 건축설계는 ‘상업적 건축설계’라고 이름 붙이자.
고상한 작품이든 허접한 건물이든 누군가에게, 이러한 ‘상업적 건축설계’에만 매달리지 않고 한 사람이 아니라 열 사람에게, 열 사람이 아니라 천 명에게 당신의 설계 덕분에 정말 생활이 풍부해졌다고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건축설계.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앞으로 건축가가 해야 할 일이다. 이런 일로 바탕을 얻게 될 때 미래의 건축가는 비로소 자신의 사회적 지도 능력을 얻게 될 것이고, 그것이 예전과는 다른 또 다른 의미의 큰 엘리트 건축가가 되는 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김광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공부했고,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건축의 공동성(共同性, commonness)을 기반으로 장소와 사회와 일상 그리고 제도를 함의한 건축의 진정성과 공공성을 추구하고, 이것을 토대로 설계하고 가르치며, 사회적 실천에 건축의 모든 가치를 두고 있다. 대통령 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 대한건축학회 부회장, 한국건축학교육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의 주택-토지에 새겨진 주거』(1991), 『건축 이전의 건축, 공동성』(2014) 등이 있으며, 역서로 『건축의장강의』(2008), 『루이스 칸: 학생들과의 대화』(2001), 『건축형태의 원리』(1989) 등이 있다.
건축가 없이도 건물은 얼마든지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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